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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 산 Dec 06. 2023

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  현판의 힘

이광사의 물水

지리산은 크고 깊은 산이다. 그 능선은 상서롭고 신비롭다. 그래서인지 계곡과 능선마다 이름난 사찰이 많이 세워져 있다. 천은사도 그런 사찰 중 하나로 세워진 지 1000년이 넘었다. 원래 이름은 감로사라 해서 맑은 샘물이 솟았는데 살고 있던 구렁이를 죽인 후 샘물은 마르고 화재가 빈번했다고 한다. 그러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예가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현판을 써준 후로는 더 이상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사람들은 구불거리는 글자의 형태를 보고 이광사가 화마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글씨에 물의 기운을 담아서 글씨를 부러 구불거리게 썼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광사는 원래도 글자의 선을 구불거리게 썼다. 어떤 작품을 보면 이것보다 더 심하게 구불거리게 쓴 작품들도 많다. 그러나 이미 몇 백년은 족히 된 듯한 이 전언에 대해 가부를 논쟁할 생각은 전혀 없다. 구렁이를 죽인 일도, 샘이 말라버린 것도, 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난 일도, 이광사가 글씨를 써준 후 화재가 줄어든 일도 모두 일어났을 수 있다. 그것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갖느냐는 별개로 사람들이 믿는 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곳은 염원이 모이는 곳, 사찰이 아닌가.


이광사는 그렇다면 왜 수 기운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글씨도 구불거리게 썼을까? 이광사는 300년 전에 전남 완도 신지도에 유배를 왔다. 당쟁이 격화되는 가운데에 명문가였던 그의 집안은 큰 화를 입었고, 그는 평생 유배지에서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왕의 은혜로 알고 살아남었던 인물이다. 지리산 천은사 말고도 대흥사에도 그의 글씨가 있는 것은 우연일 수 없고, 호남을 대표한 조선 말기의 서예가 이삼만의 서풍에서 이광사의 흔적을 쉽게 간취할 수 있는 것 또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광사는 조선의 중심에서 아주 멀리 변경으로 밀려났다. 그의 삶도 주류에서 밀려나 그 어떤 공적인 흔적을 남기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원치 않게 예술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비범한 재능은 고된 세월을 버텨 그를 조선의 18세기, 한 세기를 대표하는 서예가를 호명할 때 제일 먼저 부르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가 쓴 글씨는 강력한 신성이 담길 그릇으로 합당하여 천은사에 오래된 화마 조차도 다스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하고 단단했다.  화마조차도 좌절한 인간이 긴 삶을 버텨내고 얻어낸 인내와 초월 그리고 체념과 깨달음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광사는 변방인으로 삶을 받아들였다. 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 강력한 에너지에서 한 발 떨어져, 개인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표현에 눈을 돌릴 수 있을 만큼 용기를 내었다. 그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를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했고 이를 드러냈다. 왕의 마음에 드는 글씨, 왕이 칭찬하는 글씨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글씨를 구현했다. 그는 그렇게 자유를 얻어 예술가가 되었다. 100년 후에 나타난 불세출의 예술가 추사는 그의 글씨가 근본이 없다고 맹비난했지만 마음에 근본은 원래 그 마음을 가진 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타인의 허락도, 인정도, 조롱조차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그렇게 조용히 끊임없이 졸졸졸 흘러나오는 옹달샘이 아니었던가?


대국의 강력한 권위의 세례를 받은 추사에게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모래위에 지은 집같아 보였을지는 몰라도 이광사는 구불거리며 미친 듯이 달려 나가고, 거칠지만 아주 정교하게 자신을 표현했다. 그래서 믿게 된다. ‘지리산 천은사’라고 쓴 이광사의 현판이 이 천은사를 화마로부터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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