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마크 브레드포드의 <keep walking> 전시는 한 인간이 살아남은 정치, 사회, 문화적 조건이 어떻게 작가의 작품 세계의 일부분 혹은 전부가 되는 가? 하는 것을 선명하고 거대하게 보여준 전시였다고 생각했다.
이 전시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전시의 첫 번째 작품 때문이었다. <float> , 한국어로 ‘떠오르다’라고 번역하는 이 작품은 작가의 대형 설치 작업으로 LA에 위치한 작가의 스튜디오 주변에서 수집한 전단지, 포스터, 신문지 등 도시의 잔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모아 전시실 바닥에 설치한 작품이다. 형형색색의 가느다란 띠와 띠가 서로 연결되어 원래의 모습과 담고 있던 메시지는 제거된 체 새로운 형체로 거기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한 관람객은 눈앞에 펼쳐진 바다 같은 도시의 잔해 위를 걷는다. 디디면 바각바각 소리를 내는 엮인 띠 위를 걷노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가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하나는 분명히 ‘자유’이다.
노출콘크리트 벽과 거대한 기둥이 떠받치는 높은 층고를 가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전시실은 국내외의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했던 공간이다. 방문자를 압도하는 이 공간에 들어와 서게 된 사람이 느끼는 것은 그 미술관이 만들어낸 질서에 온전히 편입될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듯한 압력일 때가 있다. 빡빡한 도심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이 공간이 지탱하고 있는 의미들이 그 압력에 무게가 된다.
그런 공간에 펼쳐진 버려진 잡동사니의 바다 위를 걷는 한 개인은 사막의 길 잃은 여행자가 된 것 같기도,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한 척의 배가 된 것 같기도, 그리고 가야 할 곳을 정하지 못해 방황하며 제자리를 맴도는 희미한 존재가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혼자서만 걸으며, 혼자서만 그 공간을 울리는 소리의 주인이 된 방문자는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 완전한 ‘내‘가 된 것만 같은 충만한 감각을 느끼게도 된다.
계속 걷는 존재,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걷고 있는 ‘나‘는 그 방향을 온전히 알고 있는가? 도심의 어지러운 보행로를 리드미컬하게 걸어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결코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향하는 뒷모습을 ‘기록’하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자신이 살아온 공동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매체를 사용해서 마치 그 현상만을 표현한 것 같지만, 더 나아가 ‘tell me the truth’ 차라리, 진실을 말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자신에게 혹은 여기 온 모든 이들에게,
작가의 작품에서 이렇게 풍부한 내러티브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그의 작품이 단순한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문학, 음악이 모두 함께 힘껏 의미를 심연에서 자각으로 밀어 올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보았지만 차라리 감각했다는 것이 맞을 것 같은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