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은 그야말로 의학의 황금기였다. 의학사에 빛나는 많은 위인들이 유럽의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메마르고 볼품없던 의학의 사막을 녹색의 숲으로 변모시켰다.
마취와 소독제가 발명되어 수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현미경과 사진술이 발달하여 눈에 보이지 않던 미생물과 주관에 따라 달리 보였던 인체와 질병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었으며, 코흐는 결핵균을 파스퇴르는 저온 살균법을 발견하였다. 베를린의 코흐 연구소,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는 의학 연구의 양대 산맥으로 서로 경쟁하였으며, 각국의 젊은 의학도들이 유학을 오는 성지가 되었다. 많은 부검이 행해지면서 인체와 병인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천년동안 지속되었던 갈렌의 병인론 4 체액설이 마침내 사라졌다. 프로이센 제국의 총리 비스마르크는 처음으로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여 의료를 노동자 서민에게 균등히 제공하였고, 루돌프 피로호는 공중보건학과 함께 모든 질병은 세포에서 나온다는 세포병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세기말은 다가올 새로운 세기가 보다 진보된 문명일 것임을 확신할 만큼 충분히 역동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1.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사에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참사를 맞이하게 된다.
노벨상은 과학과 의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세기말에 제정이 되어 1901년에 처음으로 수여되었는데, 이것은 또한 과학대중화·세계화의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큰 부자가가 된 스웨덴 국적의 노벨은 ‘죽음의 상인’이라 불렸지만 죽기 전에 자신의 재산을 인류 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상으로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노벨상은 처음에는 생리의학, 평화, 문학, 물리, 화학상 등 5가지였는데, 1969년에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다. 노벨이 유언을 남길 당시 스웨덴은 노르웨이를 병합하여 공화국이었는데, 노르웨이가 1905년에 독립하면서 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노벨위원회가 선정하게 되었고 나머지 5개 부분은 스웨덴의 전문 위원회가 선정하는데 그중에 생리 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위치한 연구중심의 의과대학 카롤린스카의대(1810년 개교)의 의학연구소가 심사하게 되었다.
20세기 첫 노벨상의 영광은 물리학상에 엑스레이를 발견한 뢴트겐, 생리의학상에는 디프테리아의 항독소를 개발한 에밀 베링(1854-1917)에게 돌아갔다. 디프테리아는 당시 치사율이 50%에 달하는 무서운 질환으로 독일에서만 해마다 5만 명의 아동이 사망하였지만, 항독소의 개발로 사망률이 크게 감소하였다. 예방접종이 일반화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이후 완전히 사라진 질병이 되었다. 엑스레이의 발견으로 살아있는 상태에서 인체의 내부를 볼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항독소의 개발로 수천 년 인류를 괴롭혀온 전염병을 정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첫 노벨상은 120년 노벨상 역사에서 가장 명장면으로 꼽힌다.
그런데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중에는 인류에 기여한 훌륭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해가 된 사람도 수상하였는데 두 사람이 그러하다. 나중에 노벨상이 취소되지도 않았는데 이점은 노벨상의 오점이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우리가 한때 진리라고 믿었던 것도 시간이 지나 오류로 밝혀질 수 있음을 알려주는 교훈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의사 율리우스 바그너 야우레크는 192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신경 매독 환자의 치료를 위해 환자를 말라리아에 감염을 시켰다. 말라리아는 열이 나는 질환인데, 열이 매독균을 사멸시킨다는 논리였다. 이로서 정신질환의 치료에 발열요법과 쇼크요법의 근거를 만들었는데 그 공로로 수상하게 된 것이다. 매독균을 죽이는 페니실린 항생제가 개발되기 전이었지만, 매독균에 항균 작용이 있는 살발산은 이미 개발된 상태였다. 살발산이라는 치료제가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고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말라리아를 감염시킨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무모한 행위로, 요새 같으면 환자와 가족으로부터 몰매를 맞을 일이다.
포르투갈의 신경과의사 예가스 모니즈는 1949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는 중증의 정신질환자의 뇌를 절제하여 증상을 완화하는 획기적인 치료법을 인정받아 수상하였다. 그는 포르투갈에서는 유통되는 최고액권의 지폐에 초상이 인쇄될 정도로 위인 대접을 받는다. 당시 만해도 정신질환의 치료 방법은 없었다. 평생을 감옥 같은 병실에 가두거나, 날뛰는 환자는 구속복을 입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클로르프로마진, 할로페리돌, 리튬 같은 항정신성 약제는 나중에 개발되었으니 당시 뇌절제술은 사람들에게 정신질환을 수술로 고치는 혁신적인 치료법으로 주목받을 만하였다.
모니즈는 1935년에 처음으로 정신질환자의 뇌를 절제하는 수술을 하였는데 20 례의 수술을 한 후 이의 결과를 모아서 1936년 정신질환의 외과적 치료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러한 수술을 정신외과(psychosurgery)라 명명하였다. 그의 발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그해 윌터 프리만과 제임스 와트가 모니즈의 수술법을 간편하게 변형하여 경안전두엽 절세술과 미국식 뇌절세술(american lobotomy)을 하였는데 이는 전신 마취 없이 부분 마취로만 수술이 가능했고 수술시간도 10분이면 충분하였다. 수술이 간편해지자 수많은 정신질환자들이 보호자들에게 끌려와 수술을 받았다. 1970년대까지 줄잡아 수십만 명의 환자가 수술을 받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있던 사고기능과 기억력마저 잃고 폐인이 되었다.
윌터 프리먼의 미국식 뇌 절제술. 구멍으로 송곳을 넣어 휘저어 전두엽을 파괴함
노벨상이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두 예에서 보았듯이 완벽하게 받을 만한 사람만 받는 것은 아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발명과 발견이 모두 문명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며, 오류로 밝혀져서 폐지되거나 가치가 없어져 잊히는 것도 있다. 결국에는 노벨상 받은 것 중에서도 진정으로 인류에 이바지한 것, 인류의 보편적 정서에 어긋나지 않는 것만 살아남아 먼 훗날까지 명예롭게 기억될 것인데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