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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영 Nov 01. 2024

의학의 황금기에 활약한 유대인 의사

19세기말 오스트리아에 유대인 문화가 꽃피다.

노벨상을 유대인들은 214명이나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생리의학상은 60명으로 가장 많이 받았다. 유대인들이 노벨상을 많이 받은 것은 유대인 특유의 ‘티쿤 올람(Tikun Olam)'사상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사상에 따르면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개선시켜 완성해야 할 대상’이다. 따라서 잘못된 세상을 못 본 척 살면 안 되고 고치면서 살아야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왜?”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고 이것은 다시 창의성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민족의 울타리인 국가 없이 살아남기 위해선 국가 있는 민족보다 더 노력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긴 악바리 근성이 무려 2천 년 동안이나 누적되다 보니 타민족보다 더 뛰어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그리고 잘못된 세상을 고쳐나가야 한다는 ‘티쿤 올람’ 사상은 좋지만, 세상 잘못을 자신 주관으로 판단하거나, 자신을 세상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영웅으로 생각한다면 매우 위험한 사상이 될 수도 있다.           



각설하고,


19세기말  오스트리아에 많은 유대인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 시대 유럽은 이전과 다른 세상으로 변모하였다. 철도의 보급이 늘어나고 전기가 들어오고 상하수도가 설치되었으며 원거리 통신이 가능해졌다. 사상적으로는 프랑스에서는 내셔널리즘과 인종주의, 영국에서는 사회다윈주의, 우생학이 등장하였고 러시아에서는 공산혁명이 발발하여 혼란스러웠는데 이러한 정치사상적 혼란은 유대인 탄압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세프는 유대인에 관대한 편이었다. 이러한 탓에 많은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에 이주해 정착하게 되었다.

               

빈의 유대인의사로서 가장 유명한 의사는 누가뭐라해도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일 것이다. 그는 인간의 무의식 체계를 처음으로 정립하였으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엘렉트라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의 저서 ‘꿈의 해석’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필적할 만큼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886년 마르타 버네이스와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막내 안나 프로이트는 아버지 뒤를 이어받아 정신분석학 대가가 되었으며 ‘방어기제’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녀는 시가를 너무 많이 피워 구강암에 걸린 아버지를 죽기 전까지 간병하였다. 프로이트家는 장수 집안인 데다가 인재도 많았다. 프로이트는 구강암에 걸렸음에도 83세를 살았고 막내딸 안나는 97세를 살았다. 프로이트의 조카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미국의 PR, 마케팅의 선구자로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프로파간다’라는 책을 썼다. 역설적으로 적국 나치 독일의 괴벨스가 버네이스의 추종자였다. 그는 버네이스의 선전 전략을 그대로 모방하여 독일 대중 심리를 조작, 전체주의를 확립했다.   



         

시가를 들고 있는 프로이트




카를 콜러(1857~1944)는 프로이트와 빈 대학에 같이 다녔던  유대인 친구였는데 프로이트와 달리 일찍 진로를 결정하여 안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청년시절  프로이트는 코카인의 부분 마취효과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콜러와 함께 개구리, 그다음에는 개와 토끼의 눈에 코카인 액을 떨어뜨려 눈이 마취가 됨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수술을 하거나 성병 등의 전염병을 병동에서 치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를 도중 그만두었다.     


콜러는 다른 연구 동료 게르트너와 함께 서로의 눈꺼풀을 올리고 그 안에 코카인 액을 몇 방울 떨어뜨린 후 서로의 각막에 바늘을 대어 보았다. 각막에 바늘이 닿았음에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눈의 부분마취에 성공한 것이었다. 1884년 9월 11일에는 최초의 부분 마취 안과 수술이 빈 대학 안과 병원에서 행해졌다. 카를 콜러는 부분 마취의 발견으로 유럽의학계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카를 콜러의 유명세가 놀랍고 부러웠지만 그것은 그가 다른 길을 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 오늘날의 자신을 있게 해 준 파리 의과대학의 신경과 교수 장 마르탱 샤르테로부터 히스테리와 최면을 배우게 된다.         


 

카를 란트슈타이너(1868~1943)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 출신의 유대인 병리학자로 ABO 혈액형을 발견하였다. 오늘날 안전하게 수혈받게 된 것은 모두 그의 덕택인데 그가 목숨을 살린 사람이 1955년까지 11억 명이나 된다고 한다. 1930년에 혈액형 발견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37년에는 Rh 인자를 발견하여 수혈이 더욱 안전해졌다. 나치의 박해가 심해지자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록펠러연구소에 적을 두게 되었는데 1943년 연구도중 심장마비로 75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란트슈타이너는 평생 연구만 하는 학자의 길을 걸었는데, 연구 성과가 초인 수준으로 무려 364편의 논문을 썼다. 그의 연구 분야는 생리학, 면역학, 해부병리학, 바이러스학, 혈청학 등이며 거의 모든 기초의학을 섭렵한 최초이자 마지막 의학자이다. 환자를 직접 돌보는 진료실 의사는 즉각적인 보상이 있지만 평생 목숨을 살릴 사람이 몇 명 안 되고, 환자를 보지 않고 연구만 하는 연구실 의사는 즉각적인 보상은 없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 한국 의사들이 좀 더 많이 기초의학을 전공하기를 바라고, 정부도 의사 수만 늘릴 것이 아니라 기초의학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의사는 아니지만 의학의 황금기를 장식한 유대인 의사가 여럿 있다. 독일의 미생물학자, 면역학자인 파울 에를리히는 매독 치료제인 살바르산 606을 개발하였다. 이 약은 매독 균을 표적 살해한다고 해서 일명 ‘마법의 탄환’으로 불렸는데, 이것은 최초의 화학요법(chemotherapy)이었다. 190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러시아의 유대계 의사, 동물학자, 면역학자인 일리야 일리치 메치니코프(1845~1916)는 몸 안에 침입한 이물질, 세균을 잡아먹는 세포가 있음을 발견하였고 이를 대식세포(phagocyte)라고 명명하였다. 이 발견은 선천면역의 주요 방어 메커니즘이자 세포 매개 면역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이 공로로 1908년 에를리히와 함께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1907년 『생명의 연장: 낙관적 연구 The Prolongation of Life: Optimistic Studies』를 집필하였는데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해서는 인체의 장내 세포와 장내의 건강한 미생물(유산균)이 평화롭게 공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유대인 의사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 거대한 무의식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 것, 많은 피를 흘렸을 때 안전하게 수혈받아 목숨을 건지게 된 것, 발치를 할 때나 간단한 수술을 받을 때 통증 없이 수술받는 것, 성형수술로 얼굴을 예쁘게 고치는 것, 암에 걸렸을 때 화학 요법을 받는 것, 건강 장수를 위해 요구르트를 마시고 프로바이오틱을 먹는 것, 선천면역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은 모두 그들 덕택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큰 은혜를 입었더라도 그것을 선으로만 보답하지 않는 것이 사람 심리다. 고맙다는 마음이 들 때부터 그 이면에는 갚아야 할 빚을 졌다는 언짢음도 싹트는데 그것이 질투, 시기, 증오를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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