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약의 오남용 실태와 문제점

by 오순영

81세 A 씨는 3개월에 한 번 종합병원에 가신다. 가끔 감기에 걸리거나 소화 불량이 있으면 필자의 의원에 오셔서 진찰받고 처방을 받는 분으로 며칠 전에 한쪽 팔에 독감, 다른 쪽 팔에는 코로나 백신을 접종하시고 온몸이 아프고 열이 나서 죽기 일보직전이라며 오셨다.

A 씨 왈 예약날짜가 다가오면 병원에서 친절하게도 전화가 오거나 핸드폰 문자를 보내줘서 참 고마운데 백신 접종 안내 문자를 받아 맞게 되었다고 하신다. 병원에 가면 내과에서 혈압약과 협심증 처방받고, 안과에 가서 백내장 처방받고, 비뇨기과에서 전립선 처방받고, 신경정신과에서 불면증 처방받고, 마지막으로 류머티스 관절염은 없지만 의사가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류머티스 과에서 관절약 처방받아 복용한다고 한다. 한번 가면 100일 분의 약을 탄다니 약이 한 보따리일 것이다. 한 환자가 5인 역할을 해서 5인 진찰료와 검사료를 낸다. 이 분이 한 번에 복용하는 약을 세어보니 15알이나 된다. 이것을 매끼 복용하니 약만 먹어도 배부르게 생겼다. A 씨는 약을 이렇게 많이 먹으면 해가 될지 걱정되지만, 안 먹으면 더 큰일이 날까 봐 먹는다고 한다. 정말 그렇게 다 먹느냐고 물어보니 어떨 때는 건너뛰고 몇 가지는 빼고 먹는다고 실토하신다. 빼고 먹는 약은 따로 모아 두냐고 물어보니 처음에는 모아두었는데 많아져서 이제는 버린다고 한다. 약을 처방한 종합병원 의사는 환자가 약을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몇 달 전에는 기가 막힌 일이 있었다. 한 청년이 진료실로 들어오는데 보니 큰 키에 깡마른 체형이었고, 왼쪽 눈썹에 이어링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해서 병약하게 보였고, 우측 손목에 문신을 하였는데 쇠사슬 같은 팔찌를 하여 더욱 흉하게 보였다. 젊은이 왈 자신은 음악 하는 사람이고 유년형 류머티스 관절염 환자라는 것이다. 매일 통증에 시달려 하루하루가 지옥인데 친구 집에 다니러 왔다가 약을 가지고 오지 않아 처방받으러 왔다는 것이다. 젊은이의 행색이 만성 병자처럼 보였으며, 또 의학적인 병명을 정확히 말하고 있어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젊은 나이에 통증으로 하루를 지옥처럼 산다니 가련하고 불쌍했으며 그의 부모는 자식 때문에 얼마나 걱정이 많을까 하는 동정심마저 생겼다. 그가 내민 처방전을 보니 마약성 진통제였다. 통증이 오죽 심하면 젊은이에게 의사가 패치형 마약까지 처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초진 환자니 장기처방은 못해 준다고 말하고는 3개만 처방해 주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다른 청년 둘이 똑같은 처방을 받으러 또 왔다. 친구가 여기서 처방을 받았다며 자기들도 같은 병이 있으니 똑같이 처방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속은 줄 알았다.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고 실랑이 끝에 돌려보냈지만 청년들과 국가의 장래가 걱정되어 한동안 가슴이 아팠다.


한국은 꽤나 멋지게 보이는 의료보험제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떤 보험이든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 건강보험도 마찬가지다. 보험은 며칠이면 저절로 나을 가벼운 감기나 작은 상처로도 병의원을 찾게 만든다. 보험료를 내고 있다는 것은 병의원을 이용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이것은 의료를 제공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전액 자기 부담한다면 의사가 신중하게 검사를 하고 처방을 할 텐데 보험료로 부담하기 때문에 과잉 진료를 할 수 있다.


도덕적 해이는 스스로 나을 수 있는 기회, 고통을 이겨낼 기회를 자신에게 주어 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며 육체적으로 강한 유형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는다. 질병과 고통이 유익한 점이 전혀 없는 유해하고 무섭고 두려운 것이라 반드시 예방하고 즉시 없애야 한다는 조급증을 부채질하여, 견디고 이겨내기보다는 손쉽게 주사와 약으로 해결하는 풍조를 만든다. 더 나아가 건강이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 건강보험에 달려있다는 그릇된 인식을 국민 무의식에 심어 나약하고 의존적인 인간을 만드는데 이것은 질병과 고통에 대한 저항력뿐 아니라 사회 부조리, 불의, 부정에 대한 저항력도 약화시킨다.


또한 도덕적 해이는 자신의 잘못(술, 담배, 무절제, 향락 등)으로 얻은 병을 공적 자금으로 치료받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생기지 않도록 차단한다. 도덕적 해이가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건강보험은 항시 적자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보험료는 계속 오른다. 건강보험으로 예측이 어려운 바이러스질환까지 백신을 접종하고, 저절로 나을 질병,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병까지 치료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국민이 행복해지거나 건강해진 것은 아니다.


또 하나 문제점은 전인적이고 포괄적인 건강관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의료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것이다. 전술한 A 씨처럼 여러 가지 질병을 갖고 있는 노인 환자는 종합병원이라는 바쁘게 돌아가는 시스템에서 질환별로 쪼개진 외롭고 초라한 존재로 전락한다. 한 사람의 생애 전반, 인격, 인품, 지성은 무시되기 일쑤이며 환자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평준화된다. 거대한 병원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스』에 나오는 공장을 연상시킨다. 환자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있는 부품이 되어 병원의 시스템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분야별 전문의는 분야별로 분류되어 보내진 환자를 나사만 하루 종일 조이는 기술자처럼 기계적으로 진료한다. 인간이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시스템 속에 있는 한 인간은 시스템을 거부할 수 없다.


건강보험이 유발하는 도덕적 해이와 의료의 세분화는 오늘날 의료 과소비와 약물 오남용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2024-25년도 우리나라의 약물 오남용실태 데이터를 보면 향정신성의약품과 마약류의 처방 환자가 2000만 명을 돌파하였고, 10대 청소년 의약품 중독환자가 40% 증가하였다. 청소년은 ADHD 치료제인 메틸페니데이트와 식욕억제제의 오남용이 심각한데 이것은 온라인 비대면 진료가 큰 원인이다.

세상일은 무엇이든 지나친 것보다 약간 부족한 것이 좋은데 이것은 개인의 삶뿐 아니라 국가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데 유용한 지혜다. 스스로 나을 기회, 고통을 이겨낼 기회를 먼저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이것은 의료과잉과 약물오남용을 막을 뿐 아니라 보다 강한 인간으로 성장시키고 사회를 건전하게 만든다. 의료의 세분화로 인한 중복, 다중 처방을 막고 전인적이며 포괄적인 진료를 위해서는 전문 진료가 필요하지 않은 흔한 질환과 만성질환은 주치의, 동네 의원이 전담할 수 있도록 의료전달체계를 보다 강화해야 할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제퍼슨 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