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 남매를 둔 엄마는 60 대초에 이미 많은 금액을 지원해 온 아들만 빼고 아파트 한 채씩 명의를 다 주었다. 둘째 딸에겐 이억 현금까지 주었다. 셋째 딸에게는 국민 연금까지 일시불로 다 넣어주고 아파트 두 채를 주었다. 넷째 딸에겐 아파트와 오피스텔까지 주었다.
그리고 부동산을 명의로 해 주면 당장 날려 먹을 것 같은 아들, 그 아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좇아 거기에 부합되는 특별 장치!
아들에겐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아들이 평생 먹을 수 있을 만큼 모종의 장치까지 해 놓은 훌륭한 엄마.
그런데 맏이의 명의로 된 아파트에 이십칠 년간 거주하고 있다. 엄마는 이십칠 년 정확히 이십팔 년이 흐른, 이제 와서 그 옛날 준다던 아파트를 안 준다고 하신다. 아니 준다고 말한 적이 없으시단다.
그러시면서 자식은 '아무 필요 없다.'라고 수시로 말씀하신다.
육십 때의 말씀과 칠십 때의 생각과 팔십 때의 말씀과 구십 대를 바라보는 엄마의 생각은 많이 변화하고
움직인다. 총기는 맏이보다 더 밝으시다. 다른 노인들처럼 허술하지 않다.
교회 나갈수록 나이 든 인근 어른들의 말을 인용하여 자식들에게 재산 줄 이유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셔서 그대로 되뇌신다.
"자식복 없다고, 서운하다고"
그럼 자식에게 균등하게 대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맏이한테만 방어를 한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는 그렇다. 물론 상황과 사람 나름이겠지만
오죽하면 우리 세대를 "부모와 자식에게 낀 세대"라 하랴!
맏이는 일곱 살 때부터 엄마의 건강 악화로 집안일을 해왔고 커서 취직하고는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다른 자매보다 훨씬 부모를 많이 챙겨 왔다.
집안의 대소사에 부모의 역할 대행까지 모두 해 왔다.
친가 쪽의 관혼상제 대표로 일곱이나 되는 이모들의 관혼상제에 엄마의 집사로 대신 처리 해 왔고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맏이는 철들고나서부터 오십 년을 넘는 시간을 아들 역할까지 포함하여 딸의 역할과 의무를 진심을 다해 왔다.
늘 맏이가 계속해 온 집안 일은 해 온 만큼 당연한 몫이 되어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는 당연함으로 고착되고 무장된 채로 엄마의 충직한 비서로 알아서 척척하는 재능을 기부하는 천사처럼.....
엄마는 그런 맏이는 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셨나 보다.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맏이에게 하신 말씀
"큰애야! 이제 그만 애써도 된다. 내 죽은 후에는 안 푼도 주지 마라. 줘도 고마운 줄을 모른다." 하셨지만ᆢ
맏이는 생전 아버지의 그 말씀의 뜻이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래도 내색 않고 맏이로서 할 것은 다 했는데
'요즘 엄마가 왜 그러신 걸까? 동생들 표현대로 본래 그러한데 내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무감각해서인가?' 살면서 서운함은 느끼지 않고 그런 생각조차 품지 않고 살았는데 말이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일까? 이제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실상을 들여다보게 된 것일까?'
지난해 서울에 아이들 집을 구하는데 자금이 조금 융통되지 않아 맏이는 엄마에게 3천만 원을 어렵게 부탁드렸더니 일시에 거절당했다.
"다른 동생들이 다 가져가고 없다는 것이다.
아니? 동생들이 다 가져갔다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 그렇다. 엄마에게 말한 내가 잘못이다.
그런데 구순 바라보는 노인이 주택청약종합저축을 넣고 있으며 은행창구직원에겐 여전히 우수고객이다. 맏이도 사람인지라 서운함이 들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났다. 경기 여파로 당최 집의 전세가 나가지 않아 다시 변통하러 자존심을 죽이고 말했다. 오죽하면 말했으랴?
금융 기간에서 겨우 엄마 명의로 빌려 1년 사용 후 상환토록 했다. 맏이의 둘째 동생에겐 현금 2억을 주었다는 뒷이야기가 막내에게서 들려왔지만 모른 척하였다.
하지만 솔직히 기분이 상했다. 맏이만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어서 섭섭했다.
"맏이, 맏이!" 하면서 맏이만 바보처럼.
맏이는 이사를 가야 하는 이유를 삼 개월 전에 말씀
드리고 이사를 했다. 그랬더니 동생들에게는 "큰딸이 야반도주를 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니? 이게 친정어머니가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은가?'
그 말을 듣고 따지지도 않았지만 맏이는 엄청 속상했다. 그리고 맏이는 화가 났다. 아니 그때서야 맏이는 지나온 것들을 되새김질해 보기 시작했다.
맏이는 엄마의 노후가 걱정되어 여생을 같이 하려고
마음먹었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하고 같이 살자고 하였을 때
"내 집 있는데 왜 너랑 사느냐고?" 하셨고
두서너번 말씀드렸으나 한결같았고 그 뒤에도 누차 물었으나 엄마는 맏이하고는 같이 살 의사는 전혀 없는 듯하였다.
그런데 요양원은 가기 싫으시단 이야기를 노래처럼 하시고 자식들이 부모를 고려장 하던 시절을 이야기
하곤 하신다. 맏이 외에 다른 자매는 엄마를 모실 형편이 되지 않는다. 모두 직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누구랑 사시겠다는 건가? 아들이다.
아들이 미혼이고 백수라 챙겨야 하는 모정의 마음이라
이해가 되면서도 언제까지 자신이 아들을 보호할 순 없지 않은가?
맏이는 마음이 편치 않다. 맏이의 오지랖인가?
그러면서도 가까운 곳에 살면서 부르면 지체 없이 냉큼 와야 하는 위치에 살길 원하셨다.
철들 무렵 늘 해주시던 이야기인 '할미꽃 전설'이 있다.
딸만 셋을 둔 할머니가 노후에 거처할 때가 없어 첫 딸 집에 갔다가 눈치 보여 나온다. 다음은 둘째 딸 집에 갔다가 또 눈치 보여 나오고 셋째 딸 집에 갔다가 눈치 보여 나와서 마침내 길에서 굶어 죽었다. 그 뒤에 할머니가 죽은 그 자리에 피어난 꽃이 바로
'할미꽃!'
할미꽃 이야기를 일곱 살 때부터 듣고 자랐다.
딸들이 부모를 챙기지 않아 할미꽃이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래서인지 맏이는 33년을 지척에 살았다.
엄마에 대한 섭섭함으로 맏이는 지난날 여러 기억들을 옹졸하게 회상하게 된다.
대학 다닐 때도 책값. 용돈 얻어 쓴 일이 없다. 장학금 4년 받아 공부했다. 대학 졸업 여행도 가지 않았다.
서른 넘어 공짜밥 먹는다고 결혼해라 아우성이라 쫓기듯 결혼하였다.
결혼 때 서울집 전세 얻으려 남편 될 사람과 엄마는 짝짜꿍 하여 결혼하기 한 달 전에 이미 혼인 신고를 해 버렸다.
집 융자금 받는다고 맏이도 모르게 예비 사위와 공모한 것이다. 그 당시 맏이는 엄마 말대로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했다.
선천성 뇌동맥류로 쓰러졌을 때에도 맏이가 병원 조치랑 수술 일정 등 보호자였다. 두 달 동안 옆에서 밤낮으로 간병하여 무사히 퇴원했다.
엄마 밑의 큰 이모는 맏이에게" 고생했다. 너는 너희 엄마에게 자식 도리 이제 다 했다." 라고 하시면서 맏이를 격려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엄마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으셨다.
아버지 췌장암 진단으로 아산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에도 엄마는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었고 결혼하고 직장 있는 맏이가 나서서 비행기와 열차로 이동하여 입원하고 퇴원시키고 하였다.
그때도 엄마는 수고하였다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엄마 위암 판정으로 일원 소재 삼성병원에 모시고 올라오고 정신없이 오가고 위암수술을 위해 맏이가 보호자 되어 입원하고 수술과 퇴원 통원 등을 오르내리며 다른 자매와 아들이 있어도 모두 맏이가 맡아서 하였다.
전업주부도 아니고 직장과 육아 병행 중에도 친정 부모일이라 완쾌되기까지 열차 타고 다니면서 완치 때까지 동행해도 한 번도 수고하였다는 말이 없었다.
결혼 후 삼 십 년간 선물한 것들 큰 액수나 특별비나 상품권 보석 명품의류 선물 빼고 매달 용돈 현금 드린 것만 기록된 것을 계산해 보았다.
퇴직 후의 아버지는 맏이가 드린 용돈으로 25년 간 생활하셨고 오 년 전에 타계하셨다.
처음으로 바쁘게 살아온 시간을 돌려 들쑥날쑥한 가계부를 바탕으로 엑셀을 돌려 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에게 현금만 2억 정도 엄마에게 1억 5천 정도 지출 되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마음이 변하신 걸까? 오직 아들만 생각한다는 자매들의 말이 사실인가?
어머니와 큰 딸의 관계는 뭔가? 여때껏 한 맏이는 뭔가?' 결혼 후 가까이 살면서 대소사 막론하고 아들처럼 노릇해 온 맏이에 대한 처우가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서운함이 스멀스멀 생겨난다.
깊이 생각할수록 속상하여 단절이란 단어가 계속 생각되었다.
'불효이겠지? '
아버지 제사도 맏이가 오 년째 모시고 있다.
엄마 자신이 못 모시니 당연히 맏이가 야무치게 모신다고 믿고 넘긴 상태다.
내가 당연히 모시니 제사에 대한 것은 말씀을 아낀다.
다섯 번째 제사는 언급도 없었다.
그래서 맏이도 맘이 상해서 연락 안 한지 이개월 되었다.
그런데 남동생이 이하선 종양 수술을 해야 한다고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맏이에게 하지 않고 남편에게 해서 맏이에게 흘러 들어가란 것이다.
전화를 드렸다. 열 번 이상 울렸으나 안 받으신다.
그랬더니 전화가 왔다. 건강과 근황을 묻고 남동생을 "서울 병원에서 수술하자."라고 하니 그러지 않으시겠단다.
지금 의사들이 정부와 대립 중이라 수술도 지연될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ᆢ 수술비 때문인가?
잠시 후, 갑자기 30 년 전 이야기를 꺼내시며 결혼 초에 이천만 원 전세금 빌린 것을 안 갚았다고 하신다.
매달 월급 받아 이자 이십만 원과 원금 오십 만원씩 총 칠십만 원 상회하는 돈을 상환하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남은 잔액 부모님께 약속 지키려고 신한은행 (당시 조흥은행)에서 마이너스통장 만들어서 나머지 금액을 천만 원도 다 상환해 드렸는데ᆢ
느닷없이 이제 와서 묵은 이야기 꺼내면서 안 갚았다고 하시며 생떼를 쓰신다.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하였지만 이내 " 수첩에 가져간 돈 다 적어 놓았다. "라고 하신다.
맏이는 어이가 없다. 설왕설래하고 다시 확인 제대로 해보시라 했지만, 여전히 주장만 하신다.
부모 자식 간에 돈이야기하며 시비를 가리고 있자니 슬퍼졌다. 그리고 화가 났다. 그래서 아파트의 명의를 가져가시라고 했다. 명의는 못 가져가신단다.
'그럼 어쩌라고?'
친엄마이지만 세 살 이후부터의 현재까지 되돌아보면
"너는 내 부속품이다."는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 태어나 한국 전쟁과 군사 정권을 오래 살아온 탓으로만 돌려야만 하는가?
맏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동생들 말처럼 정말 자식 이용만 하는 엄마인가?
이제 와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남녀차별?"
"여동생에게 이억 현금 준 것은?" 줄 수도 있다. 좋아하는 자식이니까.
언젠가 맏이가 엄마에게 선물로 준 십자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그 동생에게 주었고 금팔찌 해 준 것도 그 동생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들만 자식이 아니지 않나?'
여태 그런 생각 안 해보고 부모님 위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보니 아니었다는 생각은 왜 자꾸 들면서 섭섭한지 모르겠다. 뭐가 잘못된 건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가?
그래도 가족이라 신경이 쓰이고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옆에서 맏이의 딸이 하는 말
"할머니 진짜 매정해. 엄마가 호구야? 엄마는 착한 딸 콤플렉스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라고 한다.
맏이가 정에 이끌려하는 판단보다 딸은 가방끈 길어서인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다.
그래서 아무런 반박을 못했다. 그리고 부끄럽다.
딸에게ᆢ
한 번도 속내를 말하지 않은 맏이가 잘못한 것인가?
알 수가 없다. 착잡할 뿐이다.
잊기 위해 책을 펼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벌써 새벽을 지나 여섯 시!
아침이 오고 있다. 생각에 함몰되어 허우적대는 자신이 낯설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더 보고 싶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어렵다.
지금은 맏이의 푸념 더듬이가 밤새 자라고 있다.
시간이 흘러 더듬이가 사라지더라도 이 푸념은
나를 향한 치유의 한 방편이라 생각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