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의 삶 지향
전래적 규범에 굴종, 개인 자유 침해
그리스인 죠르바(Zorba the Greek)
그리스인 죠르바는 1964년 미할리스 카코지아니스가 연출한 작품이다. 폭우가 내리는 그리스 항구에서 조르바와 버질이 만난다. 버질의 아버지 유산인 탄광을 운영하기 위해 크레타 섬으로 가려는 그때에 나이든 조르바가 등장하여 동행을 요구하고 꾸밈없는 조르바의 태도에 이끌린 버질은 그를 갈탄광의 책임자로 둘 생각으로 동행을 결정한다. 두 사람은 목재 사업을 위해 대규모 시설을 조성했으나 실패한다.
그들은 목재 사업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절망하지 않고 해변에서 춤을 추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인생의 고난에도 춤을 추는 자유로운 영혼의 환희를 선사해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조르바는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인생의 자유를 구가하는 유형이다. 버질은 욕망을 억제하여 인간의 해방과 진리 탐구를 하는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캐릭터는 성향과 가치관이 대조적인데도 잘 궁극으론 합일을 이루고 있다.
아리스트텔레스는 “쾌락적 삶, 정치적 삶, 관조적 삶”으로 구분했지만 에피크루스에 의하면 기쁨과 쾌락은 인위적 욕구를 절제하고 오직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구만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제어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므로 쾌락은 욕망이 실현될 때 느끼는 것이므로 이는 자유롭지 못한 삶이다. 생계유지를 위한 필연적 삶도 사적인 삶으로 노동이란 구속이 따르며 정치적 삶 역시 공동체 구성원의 평가에 의존하므로 공동선과 명예라는 측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관조적 삶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지적 연구를 거듭 하는 삶으로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정신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족이므로 자유와 관련된다. 조르바는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힘을 지니고 조르바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삶의 태도와 윤리적 구속을 초월하는 사랑의 즐거움, 책속의 진리를 초월한 삶의 진실을 버질에게 각성 시키며 자유로운 인생 참맛을 느끼게 한다.
조르바의 자유는 사랑과 육체의 쾌락이 최고인 듯 보이나 그의 사랑은 생명과 연결된 것 같다. 조르바는 여성을 소유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도 자유라고 인식하며, 돈, 이상, 혁명, 등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즐기는 것으로 볼 때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즐긴다. 조르바의 자유는 니체의 초인과 유관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살아간다. 나 역시 그 동안 직장생활의 중책감과 가정에서의 여러 역할을 감내하며 생활했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또 가르치는 자는 모든 면에서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의 굴레에 빠져 자신의 자유는 냉엄하게 등한시 해 왔다.
이 영화를 보고 자식 걱정, 주택 걱정, 생계 걱정, 노후 걱정, 남의 이목에 신경, 질병, 가족 관계 등 번뇌 자체인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유에 대한 열망을 지녔음에도 그것을 억압하고 그동안 바쁜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심취하여 살았음을 깨달았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은 무엇인가? 행복의 의미와 자기 충족적 삶을 생각해 보게 되는 작품이다. 필연적 삶의 운명에 구속받지 않는 조르바처럼 봉건적 이념으로 며느리에게 역할만 요구하는 것과 남편 출생 서열에 따라 동서간의 서열의 무게치와 차별, 아들을 낳지 않은 것에 대한 냉대 등 부끄러운 가족사라 감추고 있었던 것을 수면 위로 떠올려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한다.
바쁘다는 명분으로 방치했던 전근대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로워 질 것이다. 그리고 전래적 규범에 굴종하기를 요구하는 것들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도전할 것이다. 당연 의식에 매몰되었던 삶을 더 생산적이고 창조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것이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길 위의 노마드가 아닐까 한다. 설령 이것이 길 위의 노마드가 아닐지라도 난 행복하다.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자유의 날개짓을 시작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