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전란으로 인해 지배층에 대한 불신이 팽배 하였다.
시민의식의 성장되고, 성리학적 세계관의 붕괴하던 혼란기였지만 우리 정신사적으로는 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박지원 등의 거목이 존재했던 시기라서 학문적인 르네상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지원(1737-1805)은 한국고전문학사에서 출중한 문장가, 대학자로 회자되며 그의 인식과 사유의 세계는 그의 저작『연암집』에 잘 농축되어 있다.
연암은 1978년 백탑 근처로 옮겨와 이서구, 박제가, 유득공 등 학문적 교유를 했고, 이덕무, 홍대용 등과 학문적인 토의와 여행을 하였으며 『맹자』와 『사기』의 독서를 통한 역사 서적을 탐독하였다.
그리고 글쓰기의 습작을 통해 이치에 통달하고 단련된 문장력으로 사유의 능란한 자유로움이 그의 사상을 형상화 하고 있으며 그의 과작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연암은 청렴한 노론 엘리트 출신으로 청빈한 인품으로 입신양명을 지양 한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과 유배를 통해 정치에 휘말려 산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올곧은 선비로 살아가기 위해 황해도 금천 연암동에 은거 한다.
1780년 삼종형 박명원이 청의 진하사절로 갈 때 동행하여 압록강을 거쳐 북경 열하를 여행한, 기행 문학의 정수라 지칭되는『열하일기』총 26권 집필 한다.
여기에는 중국의 지리, 정치를 비롯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분야의 글을 게재하고, 이용후생적인 측면에서 기술된 대작으로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변화하기 위해 노력한 한 지식인의 고뇌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소멸하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열악한 조선의 현실을 개선하려는 변혁적인 의지는 유쾌한 유목일지인 듯하다.
<야출고북구기> <일야구도야기>에는 기괴하고 비장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당시 현실에 대한 연암의 고민과 폭염과 폭우속의 지난한 여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새로운 학문을 동경하는 호학적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점은 당시의 위정자들의 자극하기 충분하였고, 문체반정의 쓴바람을 겪는다. 그의 사유 세계의 반영은 <과농소초>에서 농사와 목축에 관한 내용으로 <소단적치인>에서는 자유자재로 고문을 구사하고, <이존당기>는 분명한 논리로 대상에 부합하여 설득하고 있다. <공작관기>에서는 공작새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문장이 돋보이며 아주 섬세하다.
<하풍죽로당기>에서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을 소재로 감수성이 뛰어난 문장으로 표현하면서도 부정된 곳이 아름다운 곳으로 변하듯 지도자가 사사로움을 버리고 애민하여야 함을 경계하고 있다.
<독락재기>에서도“선비의 독락은 재앙이다.”고 지적하며 ‘중락’해야 함을 주장했으며, <초정집서>에서는 문장의 창작은‘법고’하여 변통으로‘창신’을 강조한다.
<불이당기>에서는 목숨이 위태로운 때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올곧은 선비정신을 노래하고 있다.
<공작관문고서>에서는 이명과 코골이의 예화를 통해 글짓기의 진실성과 자기 세계에 함몰된 편견을 지니거나 깨어있지 않은 것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날렵한 비유로 양반계층의 위선과 가식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어디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요즘 글쓰는 사람들이 한번쯤 연암을 만나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