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요즘은 성탄제란 표현보다 크리스마스 표현을 더 많이 쓰는 듯하다.
오래전의 일이다. 초등학교 (그 당시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 겨울이었다.
엄마를 따라 외가에 갔다. 왜 갔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는 내 손과 내 밑의 둘째 동생의 손을 잡고, 셋째 동생을 업고서 자주 외가에 가시곤 했다.
외가에 가면 모든 것이 풍족하고 맛있는 것들이 많았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음식을 차린 개인 밥상을 따로따로 마련하여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여러 번 오가면서 밥상을 내오곤 했다. 꼬마인 나는 막내 삼촌과 같이 겸상을 늘 받아먹었던 기억이 난다.
밥을 먹은 후에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소담을 나누었지만, 나는 이야기를 할 상대나 놀아줄 상대가 없어 늘 심심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심심해하고 있었다. 오후쯤 되자, 이모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하기를
'삼촌을 따라가서 교회 구경이나 하고 오너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난 그때까지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었다. 목사인 서울 이모부가 나에게 "교회에 나가라."라고 한번 말한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교회가 어디 있는지도 잘 몰랐고, 무엇을 하는 데인지도 몰랐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동생들을 봐야 했기에 교회에 갈 시간이 없었다고 해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나의 시큰둥한 태도에 이모는 다시 말하기를
"오늘이 성탄 전야여서 삼촌이 교회의 축하 프로그램 무대에서 성탄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저녁에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동생도 자고 있어서 갔다 와도 될 것 같아 아무 대책 없이 삼촌을 따라나섰다. 외가의 대문을 나와서 나와 삼촌이 같이 걷고 있었다. 삼촌을 보더니 동네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어디 가느냐?"라고 물었다.
삼촌이 "교회에 간다."라고 말하자, 그 아주머니는 "예배당 가는 갑제." 하면서 다시 우리를 보고 말한다.
"아이고 벌써부터 천당 갈라고 기원하나?
기특하제. 어서 가 봐라 예배당에.. "
나는 그때 '예배당'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삼촌과 같이 한 10분쯤 걸어갔을까? 기다란 골목을 따라 들어가니 너른 공터가 보이더니 그 옆에 흰 건물이 하나 보였다.
그곳은 예배당이라고 하고 교회라고도 하는 곳인데
지붕에 커다랗게 가로 세로 나무를 박아 놓은 듯한
십자가가 꽂혀 있는 외가보다 큰 집이었다.
예배당 건물은 시멘트로 되어 있었고, 페인트 색깔은 약간 빛이 바래 오래된 집 같았다. 나는 삼촌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그 안은 어두운 빛의 나무바닥이 깔려있어서 더 어둡게 느껴졌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신발장을 보니 거의 검정 고무신이나 흰 고무신이었고, 운동회 때나 신는 얇은 흰 운동화가 몇 켤레 있었다. 나의 신발은 캐미슈즈, 빨강 구두였다. 안 벗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뭇바닥이 차가워서 발이 시렸지만 신발을 잘 벗어 붙박이 신발장에 가지런히 넣어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삼촌은 출연진이라 무대 뒤로 가고 난 삼촌이 등장하는 것을 보기 위해 뒤쪽에 섰다. 키가 작아 중앙의 무대가 보이지 않았다. 까치발을 해도 안 보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등이 내 머리를 막고 있었고, 사방에 둘러 싸여 나는 고립되어 있는 바위 같았다. 삼촌이 마칠 때까지 시간만 흐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 앞에 있던 어떤 어른이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나에게 내어 주었다. 아마도 나는 그 사람을 모르지만 그 사람은 나를 아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후, 삼촌의 차례에 되어 무대 위에 나타났다.
검정 슈트에 하얀 나비넥타이를 하고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했다. 곧 풍금 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것이었다. 삼촌이 멋져 보였다. 삼촌은 언제 그렇게 열심히 연습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실수 없이 잘 부르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큰 소리로 칭찬하며 박수를 쳤다.
삼촌이 부른 노래의 제목은 '탄일종'이란 노래였다.
탄일종이 /땡땡땡/
멀리멀리 퍼진다//
저 깊고 깊은 산속/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
시골의 작은 예배당에서 검은색과 흰색의 건반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삼촌의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면서 무대 위의 노래는 천사의 음성처럼 울려 퍼졌다.
또 한곡을 더 부른 것 같았는데 처음 듣는 것이라 알 수가 없었다. 축하 무대가 늦게까지 이어지더니 모두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난 기도를 할 줄 몰랐으나 모두 눈을 감길래 나도 양쪽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궁금하여 눈을 살짝 떠 보니
모두 눈을 감고 무엇이라고 외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 하나님이 눈 떴다고 벌줄까 봐 ' 다시 가만히 감고 있었다.
난 가만히 눈만 감고 있으려니 약간 창피했다. 모두 무언가를 외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이 좀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괜히 왔다'는 생각도 들었고, '다음부터는 나도 교회 다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긴 손잡이를 잠자리채를 든 사람이 사람들 앞으로 그 채를 움직이며 갖다 대고 있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윗주머니나 바지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넣는 것이었다.
어떤 할머니는 몸배 (여자들이 일할때 입는 밑이 헐렁한 바지) 속에 깊숙이 넣어둔 복주머니를 꺼내어 끈을 풀더니 그 안에 접힌 돈을 꺼내어 양손으로 훑어서 펴서 잠자리채 안에 넣는 것이었다.
잠자리채는 잠자리나 매미만 잡는 게 아니었다. 난 '아무것도 없이 왔는데 어떡하지?' 하고 있을 때,
그 잠자리채가 내 얼굴 앞에 정지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고 계속 멈추어 있는 것이었다.
난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창피하다는 것을 느꼈다.
엄마에게 심부름 값으로 받은 50원이 있었는데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나에게 그 아무도 잠자리채에 돈을 넣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의식은 끝난 것 같았다. 삼촌은 마치고 출연진들과 함께 또 다른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나 혼자 먼저 가야 한다고 했다.
난 다른 사람들이 다 마치고 나오면 복잡할 것 같아 먼저 나왔다. 마룻바닥이 차가워서 뒤꿈치를 들고 신발장으로 갔다.
그런데 내 빨간 슈즈가 보이지 않았다. '누가 내 신발을 가져간 거야?'
난 그날 신발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오면 나는 내 구두를 가져간 사람처럼 나쁜 사람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난 교회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난 그 후론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신발 도둑이 있는 곳이어서였을까? 잃어버린 신발과 그 시린 겨울 땅을 밟고 외가까지 걸어온 춥고 시린 기억이 가슴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잠자리채가 다른 사람 앞으로 빨리 가지 않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 무안함 때문이었을까?
내 속에 스며 있는 성탄제의 추억이 아련하게 생각 떠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