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련한 그대
언제 만났는지
알 수 없어요
무명 적삼 다려 입고
맷돌방아 쉬엄쉬엄 장난 삼아 돌리던
그 웃음꽃 묻어나던 시절이었을까요?
서책 끼고 규장각을 돌아 나오는
담담한 그대의 홍안을 훔쳐보던
어느 따뜻한 봄볕 담장 아래였을까요?
목적지 없이 표류하듯 항해하는 조각배가
가을 저물녘에서 잠깐 멈춘
검은초록 바위 곁의 갈대밭이었을까요?
알 수 없어요
빛바랜 배낭을 메고
낯선 동유럽의 작은 도시들의 골목길을 걸으며
야릇한 이방인이 되어 휘청될 때도
마치 춤추듯 호기심 안은 채
그대와 동행하는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짙은 황혼빛의 도나우 강변에서
사랑을 맹세하면 이루어진다는
세계적인 속설의 예언을
슬픈 전설처럼 믿었기에
망설임 없이 그대와 나를 수장했습니다.
은빛 물살이 찬란한 햇살을 향해
어지러움 토해내는 트레비 분수 마당에서
피어오르는 물거품을 따라
그대는 부활했습니다.
눈앞엔 숱한 염원을 담아
낙하한 피멍 든 각 나라의 동전들이
말없이 한 스푼의 체념으로
흔쾌히 물속 동거를 시작하며
거대한 향연을 꿈꿉니다.
마치 사랑의 꿈을 잉태하고
태어날 내일을
숨죽이며 기다립니다.
정녕 알 수 없습니다.
이젠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지금
그대를 결코 만난 적이 없다는
얄팍한 최면을 스스로 걸어보지만
이내 하얗게 어질해집니다.
농염한 머리 속 생각만으로
오롯이 그대를 품은 따뜻한 시간은
중량의 나이테를 두른 채
마냥 심연의 바다를 헤매는
처연한 한 마리 고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