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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이미 Nov 08. 2024

욕망보다 이성적 존재이길

철학사에서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관점에 따라 이성파와 욕망파로 대별되며 대부분의 철학자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인식하였으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대조로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본 철학자는 홉스와 홈, 프로이드를 들 수 있다.


 플라톤은『알키비아데스』에서 인간이 부나 쾌락을 추종하면서 육체만 돌보며 영혼을 돌보지 않는 것에 착안하여 인간의 진정한 주체는 영혼이며 영혼의 핵심이 이성이라 인식하였다.


플라톤의 이러한 인식은 즉물적 만족에 몰두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그의 철학적 고민이다. 두 마리의 못된 말과 마부로 비유하여『파이돈』에는 육체와 영혼의 대화가 계속된다. 그의 메시지는 인간의 이성, 기개, 욕망 중에 이성이 기개와 욕망을 잘 조절하는 것이 조화될 때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것이다. “영혼의 각 부류가 서로 간섭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것을 조절 하고 통솔 하고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최저음 최고음 중간음의 세 음정처럼 전체를 조화하는 거라네.” 하지만 인간은 어느 정도 영혼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으나 육체의 교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이 한계임을 지적한다.


영혼불멸을 믿은 플라톤은 찰나의 이익보다는 내면의 세계가 가치롭다고 생각하여 조화를 중시한 것이다.

 국가 역시 계급들의 불화를 없애기 위해 존재하며 개인이 이성적 사유를 할 수 있도록 국가가 잘 기능해야 한다. 물질과 이익을 추구하는 생산자 계급은 절제의 덕을 지향하고 명예나 승리를 추구 하는 수호자의 계급은 용기의 덕을, 지식을 추구하는 철학자 계급은 지혜의 덕을 갖출 때 건강한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삶의 올바른 방법에 대해 봉착하여 고민하고 갈등하며 그 방법을 모색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상충된 이성과 욕망이 존재하나 필자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시대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눈뜨고 일어나면 집값 상승과 어려운 경제를 보면서 부의 양극화는 심각하다.


 불과 80년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돈을 추구하는 것은 속물이라는 인식 속에 살았는데 지금의 사회는 어떠한가? 정치판을 보더라도 청빈한 사람은 무능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분위기이다. 이런 현상은 인문학의 부재, 철학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나이 듦에 따라 인간에 대해 자기객관화 하여 소크라테스가 지적한 ‘너의 무지의 자각’을 하고 삶의 향방에 대한 깊은 사유는 축적된 철학의 역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고 공공의 선을 위해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라튈로스』에서 사물의 본성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기에 참된 본성을 파악하는 것이 지식이며 이것이 참된 세계(이데아)라 말했듯이 삶의 여정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욕망을 제거하여 이성을 우위에 놓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그 길이 비록 고독하더라도 그것은 아름다운 길이다.


 이 어찌 철학자만의 인식과 생활이겠는가? 욕망을 채우려 또 다른 것을 욕망하는 타인을 추종하지 말고 참된 본성의 세계, 이데아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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