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오는 명절과 생일 외에도 결혼하고 맞벌이 부부이면서도 2주에 한 번씩 바쁠 때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우리는 시댁에 갔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신혼 초에도 우리의 신혼 생활에 대한 미래 설계보다는 시풍을 익혀야 하는 명분으로......
올해 결혼 33년,
강산도 3번이나 바뀐다는 그간의 30년 동안 난 역할에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 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최근 3년은 나는 발을 의도적으로 끊었고 현재는 남편만 가고 있다.
다가오는 이번 설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처음으로 "설날 이전에 자기 집을 먼저 다녀온다."라고 한다.
'언제부터 내 허락이 필요한 거지? 아니야 이것도 통보인 건가?'
그 말을 하는 그가 왠지 낯설게 느껴짐은 왜일까? '
배울 만큼 배우고 알 만큼 아는 내가 직장 생활을 하며, 집안일에 한 치의 도움의 손길 없이 해 오면서도
교육자인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으려고 내 감정은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 무슨 봉건시대도 아니면서 친정 엄마의 삼종지도(아버지, 남편,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의 철학에 부응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부모에게 잘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한 것은 여태껏 내가 머리 굵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고, 인간은 교화가 된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빠듯한 고교교육 시스템으로 돌아와야 하는 주어진 현실에서 그런 잡다한 것에, 또 사치스러운 감정의 소모에 머물 시간적, 정신적인 이유가 없어서 그 일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성격이 뒤끝이 없는 어리석은 탓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니 자유롭게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그것은 잘못이라고 반드시 이야기하려 한다. 시간의 여유가 생긴 요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간 참 어리석게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좋지 않은 환경은 개선하고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타당하고 엄연하거늘 바쁘다고 내 귀중한 삶을 허송하고 있었단 자책이 드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현실적인 위치 변동만 있을 뿐, 나를 둘러싼 외적 환경은 변한 것은 없다. 그동안 현실을 박차고 나오지 못한 것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이 결혼 생활을 온전히 지탱해 온 것은 사랑하는 자식들의 교육에 대한 책임감과 모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고, 부모님에게 생전에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제는 침묵을 깰 때가 되었다.
이혼이 해법이 아닐지라도 영혼의 자유를 찾고 싶은 것이다. 착한 콤플렉스에서 탈피해야 한다.
효부도, 효녀도, 아내도 훌렁 다 벗어 내리고 딸들과 나를 위해 그저 자유롭게 살고 싶다.
시어머니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들도 역시 남의 편이다. 남편이 나의 보호자라고 생각한 건 온전한 나의 관념 속 착각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결혼 생활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직장생활과 딸 둘의 양육과 교육을 제외하고는 마음에 드는 것은 단 하루도 없었음을 발견하고 나 자신도 사뭇 놀랐다. 내가 이렇게 아둔했는지를 ᆢ
그런데 난 그것을 인식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 숱한 시간을 버티게 해 주고 그것을 희석시킨 것은 나의 일
이 있고 내 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내적 성장과 나를 따르는 제자들의 대학과 인생의 꿈을 조력하는, 내 작지만 소중한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현실 속에 철저히 감추어진 또 다른 자아를 밀실에 숨겨둔 채, 해방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그 소중하고 작은 세계가 곧 나에게 독이 되고 있었음을 안다.
당시에 일이 생길 때마다 투쟁하여 쟁취해야 했을까?
지금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만 13개 항이다.
1. 33년의 결혼 생활 중 설 추석에 남편은 친가만 먼저 갔다. 단 한 번도 처가에 먼저 가지 않았다.
2. 남편의 바람과 로렉스 시계 1300 만원 짜리 분실하였다.
3. 시부모 용돈 봉투(최저 30 - 70만)를 내가 드리는데도 이중으로 나 모르게 지속적으로 해 왔으며 자기 집 일에 대한 논의가 절대 없고 뒤에 자연스레 알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4. 아내가 아파도 자기 엄마가 먼저이다.
5. 자기 집은 빈손으로 절대 안 가고, 처가는 늘 맨손으로 간다.
6. 아들 낳지 않았다고 미역국도 먹지 말라고 했고 아들 못 낳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7. 33년간 며느리 용돈 받으면서 한 번도 며느리 생일 손녀 생일 챙겨 준 일 없다.
8. 딸들이 입학해서 대학원 졸업 때까지 한 번도 축하해 준 일도 없다.
9. 친정아버지 장례식에 시부모 오지 않았다.
10. 차남인데 장남의 몫을 다 했다.
11. 8번의 이사에도 휴지 한 개 사 오지 않았다.
12. 며느리가 병원에 입원을 5번이나 해도 한 번도 오지 않았다.
13. 손녀 둘이 업어 준 적, 양말 한 짝 사 준 적 돌봐 준 적이 없다.
(수시 버전)
시어머니 전화만 오면 달려간다. 왕복 5시간 거리를 하루 연차를 내고 간다. 거의 심부름꾼 수준이다
아들은 아주 효자이다. 시어머니의 상습적인 전화가 문제이다. 시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말이다.
1번부터 5번은 남편에게 해당되고, 6번부터 13번은 시어머니에 대한 떠오르는 것만 대충 적은 것이다.
이게 가족입니까? 어른입니까?
한 때는
백화점에서 가서
그녀를 위한
실크 블라우스를 구입하고
곧 뜯어버려 질
화려한 선물 포장지로 단장하여
그녀에게 건네기도 하고
평생 입지 못했던 좋은 옷이랑
그녀 남편조차 해 주지 않은 좋은 음식이랑
다달이 드렸던 두툼한 용돈.
우린 둘이 번다고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더 많이 경제적인 부담도 감내했다.
이따금 속상할 때는 ' 아이들 친가니까? 또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의 부모니까? 나도 수입이 있으니까 ' 위로하며 참고 살아온 시간.
30년간 해 발생된 크고 작은 일들이 어디 한 두개랴 마는
시아버지 입원, 집안의 길흉사의 잦은 대리 부조 등등
차남인 남편이 가서 다 해결하고 피곤에 지치면
섭섭해하다가 설왕설래하며 싸우기도 하고 주장하기도 하는 시간 속에
기억은 이따금 휘발 하여 날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회로를 순환하여 반성 모드로 버튼이 돌아오고, 또 모질지 못한 성격은 한 편으론 ‘섭섭하지 않을까 ?' 하는 근원 모를 불안감이 저 아래 무의식의 기저에서 몰려와 상념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아무도 몰래 백색의 봉투에 급여의 25%가 넘는 사치한 용돈을 담아 건네면, 그녀의 입은 당연한 세금을 받아가는 준엄함으로 굳게 다문 채 고요히 받아들이곤 했다.
마치 아들이 번 돈 받아야 하는 듯 눈가에는 설핏 미소가 스미었다.
그래서인지 30년 간 단 한 번도 고마움을 말하진 않았다. 최근까지도
생각해 보면, 내 지나온 삶은 내키지 않는 대상에 대한
과소비와 과지출한 날들의 축적이다.
예쁜 나의 두 딸에게는 싸구려 양말 하나도 분유 한통도
그 흔한 기저귀 하나도 허락하지 않은 무정한 그녀!
한 번도
안아주지도
업어주지도 않던
법적 친족이기만 그녀!
"부모에게는 봉양을 효도를 " 훌륭한 가르침이다!
지행합일과 섬김의 미학으로
아름다운 쇠사슬에 묶여
인내하며 자위하는 시간들의
학습의 합집합은
효도 1 등급이란
쓰디쓴 달콤함으로
무장한 충실한 유교 자녀로
보상받기 위해 걸어온 길인가?
아니면
여기에
중독된 것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가족은 의식주만 해결하는 그냥 동거만 하는 가족이었음을.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내 자유로움의 구가는 나의 이기심의 발로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