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주체성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을 근거로, 교육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요즘 트렌드인 듯하다. 혹자는 그 통찰을 거의 신념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인간의 탐구와 배움을 철저히 ‘수익 창출 가능성’으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만약 어떤 것을 배우고 탐구할 이유가 오직 돈이 되는지 여부라면, 이제 세상에 남아 있는 탐구의 대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인간과 비교조차 불가능한 빠른 데이터 학습 능력과 로봇의 대량 생산 체계 앞에서 대부분의 직업은 순서만 다를 뿐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대체될 것이다.
인공지능 등장 초기엔 사무 업무가 먼저 대체되고 예술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예상했지만 대체가 광범위하게 시작된 분야는 사무직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예술 영역이었다.
프롬프트 몇 줄로 하루에도 수만 개의 음악, 영상이 생성되는 시대다. 이러한 생성물들은 빠르게 평준화, 상업화되고, 비용을 절감하는 데에는 탁월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걸로 얼마나 벌 수 있을까’ 외에 그 어떤 의도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무수히 소비되지만, 아무도 그것을 ‘겪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술가란 어떤 직업일까?
내게 예술가란 직업이라기보다 하나의 상태에 가깝다.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의 껍질 바깥을 바라보고, 동시에 타인의 껍질 안을 들여다보려는 상태.
흔히 어떤 분야의 기술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라고 하지만 숙련된 기술은 더 넓은 예술 세계의 표현을 위한 도구에 가깝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 “이다.
이런 맥락에서 직업으로서의 예술가는 이미 대체되기 시작했을지 몰라도, 예술의 주체로서의 ‘예술가’는 대체될 수 없는 속성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설령 인공지능을 통해 그럴듯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해도, 그 안에는 결정적으로 ‘나’가 없다. 그리고 그건, 더 이상 내가 음악을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무엇을 대체할 수 있는지를 논하는 일보다, 인간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질문이 무엇인지 묻는 일이 더 중요해진 시대에 우리는 이미 들어섰다.
배움도, 예술도, 탐구도 결국 그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돈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나이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배우고, 묻고,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