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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5. 2023

1. 진명선인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꽃잎이 흔들렸다. 1년에 세 번씩 꽃을 피우는 삼화수가 붉은 꽃을 피워 올리자 선계의 꽃밭에 그윽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봄과 여름에 흰 꽃을 피웠던 나무에서 붉은 해를 닮은 꽃망울이 터졌다. 선계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흰옷을 입은 진명 선인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선인은 키가 크고 이마가 반듯했다. 짙은 눈썹 밑의 눈동자가 유난히 컸다. 진명 선인이 꽃향기를 맡아보았다. 달고 진한 향내는 머리를 맑게 해주는 명약이었다. 

 "귀한 손님이 오시는 걸 아는 모양이군."


 진명 선인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계의 꽃밭에는 온갖 기이한 꽃과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죽은 이를 살리게 하는 구명초, 수십 년 동안 잠을 자게 하는 수면초, 늙지 않게 하는 불로초,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소복초, 눈을 뜨게 하는 개명초……. 


 진명 선인은 삼화수 한 포기를 꺾어 품에 넣었다. 꽃을 꺾은 자리에 바로 한 송이 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진명 선인이 휘파람을 불어 학을 불렀다. 

 "조금 있으면 묘시로구나. 늦지 않게 우물가로 가도록 하자."

 학이 몸을 낮추고 다가오자 진명 선인이 그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학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긴 날개를 펼쳐 선계의 꽃밭을 한 바퀴 돌았다. 진명 선인은 학에 올라타 선계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멀리 삼백산 정상에는 오색찬란한 구름이 걸려 있었다. 구름 사이로 우뚝 우뚝 솟아 있는 기암들이 보였다. 기암 아래에는 상제가 사는 궁전이 있었다. 상제는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궁궐을 지었다. 궁전은 금과 은, 칠보로 단장되어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은 구름의 색깔까지 물들였다. 옥으로 만든 누각에는 시가 새겨져 있고, 선녀들은 하루 종일 음악을 연주했다. 


 그 아래 옥 계단을 따라 내려와 수정 문으로 들어서면 선인들이 모여 사는 길상촌이 있었다. 선인들은 누린내가 나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이슬을 모아 끓인 차를 마셨다. 길상촌에서는 은은한 웃음소리가 들렸으며 아침저녁으로 노랫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학이 길상촌에 막 내리려는 순간, 진명 선인은 품 속에서 푸른 돌을 꺼내 공중을 향해 던졌다. 푸른 돌은 그대로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가 싶더니 양쪽 귀퉁이에서 날개가 돋아났다. 날개 돋친 돌은 반짝하고 빛을 발하고 이내 파랑새로 변했다. 

 "회색 수염을 불러오너라."

 파랑새는 대장간 마을 쪽으로 날아갔다. 진명 선인은 파랑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 우물가로 걸어 내려갔다. 


 우물가에는 타원형의 잎이 달린 신이대가 빙 둘러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는 댓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물에서 은은한 향내가 풍겨왔다. 층층이 쌓여 있는 검은 우물돌이 더 반들반들하게 윤이 났다.  

 진명 선인은 우물물을 떠서 삼화수의 꽃잎에 조심스레 부었다. 꽃은 한층 더 생기 있어 보였다. 인간 세상에서 온 손님이 선계에 머무는 동안 꽃은 시들지 않을 것이다. 


 진명 선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물가에 모인 선인들은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진명 선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촌각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어찌 큰일을 할 수 있으리."

 진명 선인이 우물에 손을 깊이 담갔다. 하얀 선인의 손목이 천천히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선인이 눈을 감고 뭔가를 중얼거리자 잔잔한 우물에 동심원이 생겼다. 


 우물 속에서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선계의 자랑, 선계의 소식통 '말하는 우물'입니다. 선인들께   서는 어서 우물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찰방거리는 우물의 목소리가 선계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우물이 전하는 소리는 길상촌뿐 아니라 선계 전체에 전해진다. 잠에서 깬 선인들이 우물가로 모여들었다. 눈처럼 하얀 얼굴색의 선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주위가 환해졌다. 


 진명 선인의 모습이 우물에 비쳤다. 선인이 고갯짓을 하자 말하는 우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올해는 갑자년입니다. 아기 동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주가 시작된 것이 바로 갑자년이지요. 그리고 지난 갑자년에는 선계의 기운을 받은 혁거세왕이 진한 땅에서 사로국을 세웠고요. 올해에도 다시 한번 사로국의 혁거세왕이 선계를 찾아온답니다. 상제께서는 성대한 잔치를 여신다 하니, 여러 선인들께서는 귀한 손님을 맞을 차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물의 말을 듣고 선인들 사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사로국의 혁거세 왕은 선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지난 갑자년에 그는 열세 살의 나이로 선계에 왔다. 상제는 그를 위해 금척을 내렸다. 혁거세가 두 번 절하고 신물을 받아 들었다. 그의 몸에서 환한 빛이 쏟아졌다. 선인들은 바로 어제처럼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참고로 여기 계시는 진명 선인께서는 그 귀한 삼화수를 준비하셨지요. 일 년에 세 번이나 꽃을 피운다는 삼화수를 말입니다."

 우물은 언제나처럼 수다스러웠다. 우물 속 진명 선인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간지러운 듯 우물에서 출렁거리는 웃음소리가 났다. 어린 동자 하나가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그런데 왜 상제께서는 사로국 왕을 특별히 귀하게 여기십니까?"

진명 선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동자를 바라보았다. 동그란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우물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찰찰. 사로국은 선계와 아주 관계가 깊은 나라지요. 사로국의 동악(토함산을 부르   던 말)은 우리가 사는 선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저 동악에 안개가 자주 낀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것이 선계의 기운입니다. 동악은 선계의 양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산이예요. 에…선계와 인간계 사이에는 이런 호흡이 중요하답니다. 한쪽이 들이마시고 내뱉는 일을 하지 못하면, 그 기운이 몹시 상하게 되거든요. 공기가 나빠지고 악취가 나고, 물이 썩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니깐……."


 한번 터진 우물의 말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진명 선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름지기 선계의 우물이라 하면 선인들의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말을 아껴야 한다. 진명 선인이 우물에서 손목을 뺐다. 그러자 우물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다 그쳤다. 

 "우물의 말을 들었으면, 상황을 잘 이해했을 것이오. 귀한 손님이 오시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오. 선인들께서는 각자 자신의 집 주위를 정갈하게 하고, 연회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시오."


 진명 선인은 창을 들고 신이대 뒤쪽에 서 있던 선인군들 쪽으로 갔다. 선계를 지키는 선인군들은 바람처럼 날쌔고 범처럼 용맹스러웠다. 낯익은 선인군이 진명 선인을 보고 예를 표했다. 


 "정처 없이 떠돌던 귀신들이 인간계로 빠져나가 분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선 계의 질서를 잘 지켜야 할 것이오."

 "예, 잘 알겠습니다."

 뒤쪽에 있던 선인군들이 절도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선인들이 소매가 넓고 옷자락이 긴 옷을 입은 데 비해 선인군들은 몸에 딱 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위에 쇠판을 비늘처럼 엮어 만든 갑옷을 덧입었다. 


 그들은 각자의 어깨에 그물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정령이든 귀신이든 그 그물에 걸리기만 하면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된다. 그물에 몸에 닿는 순간 돌처럼 굳어져서 암흑의 동굴로 끌려가게 된다.  


 우물이 답답한 듯 '웅웅' 거렸지만 진명 선인은 짐짓 외면을 했다. 모두에게 널리 알려야 할 내용은 이미 다 전했다. 이제 우물가를 떠나 은밀하게 움직일 일만 남아 있었다.  


 진명 선인은 손을 내밀어 파랑새를 불렀다. 파랑새는 진명 선인의 주위를 두어 바퀴 돌다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파랑새가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진명 선인이 입김을 '후'하고 불어넣으니 파랑새는 다시 작은 돌멩이로 변했다.


 선인의 석조는 이미 회색 수염을 데리고 와 있었다. 회색 수염과 눈이 마주치자 선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는 매사에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정령이었다.  


 선계에는 선인들만이 모여 사는 것은 아니었다. 선인들을 뒷바라지하는 정령들도 선계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마을에서 일을 하며 살아갔다. 길쌈을 하는 정령, 음식을 만드는 정령, 그릇을 만드는 정령, 술을 빚는 정령, 쇠를 부리는 정령……. 선인들이 편안하고 여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정령들의 수고가 필요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회색 수염은 선계의 대장간 마을에 사는 정령이었다. 쇠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도 쇠의 상태를 아는 대장간의 우두머리였다.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는가?"

 진명 선인이 회색 수염에게 물었다. 누가 들을세라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무길이 지금 열과 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맑은 메질 소리는 처음 들어 보았습니다. 보기 드문 물건이 나올 듯합니다."

 "반가운 소리구만. 상제께서도 기뻐하실 걸세."

 "이 모두가 바다와 같은 상제의 은혜 덕분입니다."

 "하하하. 자네 말이 맞네. 상제께서 혁거세 왕에게 신검을 내리시면 사로국은 더 강건해질 게야. 침략하고 빼앗으려는 무리들이 동해에 얼씬도 못하겠지. 혁거세 왕이 그렇게 동악과 동해구를 든든하게 지켜주면, 선계의 정기도 더 맑아질 걸세. 참…전에 이른 대로 무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길은 평소처럼 선인군들의 칼을 만드는 줄 알고 있습니다."

 회색 수염은 무길의 얼굴을 떠올렸다. 회색 수염이 이렇게 대장간을 비울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무길 덕분이었다. 무길도 회색 수염 못지않게 솜씨 좋은 대장장이였다. 아니 불을 다루는 기술만은 회색 수염보다 한 수 위였다. 


 무길이 처음 대장간에 왔을 때, 회색 수염은 그에게 화덕의 불을 지피는 일을 맡겼다. 불의 정령의 아들답게 뜨거운 불을 잘 견뎠다.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풀무질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자기 맘대로 다룰 수 있었다. 불을 다룬 지 3년이 지났을 때, 회색 수염은 자신의 메를 무길에게 주었다.


 진명 선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인들은 제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우물터에는 삽사리 한 마리만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자네에게 특별한 명을 내리기 위해 불렀다네." 

 "명이라 하심은……."

 "자네는 인간 세상으로 혁거세 왕을 맞으러 가게."

 "인간 세상으로요? 혁거세왕은 천마를 타고 오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 물론 천마도 인간 세상에 보내야 하겠지. 하지만 혁거세 왕도 인간들의 나이로 벌써 일흔을 넘기지 않았나. 아무리 천마를 타고 온다고 해도, 이 먼 선계까지 오가는 길이 고되고 힘들 것이야. 자네가 가서 함께 오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자, 이 학을 타고 가게나."


 선인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어느새 검은 학이 날아와 있었다. 칠흑 같은 밤처럼 까만 깃털을 가진 학이었다. 검은 깃털이 반들반들하게 윤이 났다. 

 회색 수염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상제의 궁전을 지키는 현학이 아닙니까? 감히 제가 이 학을 타도 되겠습니까?"

 "상제께서 자네에게 현학을 내어 주시라 친히 명하셨네."


 진명 선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색 수염은 엎드려 절을 했다. 현학을 타는 것은 선인들에게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회색 수염은 자신이 맡은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겼다. 


 "그리고 여기 삼화수를 받게나. 혁거세 왕이 긴 여정을 견디려면 이게 필요할 걸세."

 진명 선인은 품속에서 삼화수를 꺼냈다. 붉은 꽃송이는 방금 선녀가 그린 그림 속에서 나온 듯 선연했다. 

 "잘 알겠습니다. 한 치의 실수도 없게 하겠습니다."


 회색 수염은 품 속 깊이 삼화수를 집어넣었다. 아련한 향기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선인군 두엇을 딸려 보내고자 했으나, 혹시 뭇사람들 눈에 띄는 불상사가 생길까 걱정이 되네. 자네 혼자 뿐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네."


 회색 수염은 훌륭한 대장장이일 뿐 아니라, 수많은 전쟁을 치른 선계의 군사였다. 그 어떤 선인군보다 훌륭한 일당 백의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회색 수염이 긴 망토를 걷어올리고 등에 매달린 방패를 보여주었다. 

 "말씀하신 대로 방패를 가지고 왔습니다."

 거뭇거뭇한 방패에는 여기저기 칼자국이 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방패로 수많은 적들을 물리쳤다.  

 진명 선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했네. 이제 곧 인간계에 밤이 찾아드니, 어서 출발하도록 하게나."


 회색 수염은 두 번 절하고 현학에 올라탔다. 회색 수염의 몸집이 커서 현학이 잠시 기우뚱했다. 이내 중심을 잡고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진명 선인은 두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웠다. 하늘 가운데로 회색 구름이 모여들더니, 회오리 모양을 만들었다. 회오리 구름은 점점 위로 올라가 회색 수염이 탄 현학을 휘감았다. 


 잠시 후, 회오리 구름 속으로 한줄기 햇살이 비추고 사라졌다. 회색 수염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도 궁전으로 돌아갈 시간이군. "

 바람결에 향긋한 산나물 냄새가 났다. 궁전의 선녀들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명 선인은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휘파람을 불어 자신의 학을 불렀다. 선인은 서둘러 궁전으로 돌아갔다. 


 우물가 나무 그늘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개의 그림자처럼 보였지만 개가 자리를 옮긴 뒤에도 그림자가 남아있었다. 밤이 어둑해지자 그림자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그림자 비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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