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숙현 Jul 15. 2023

2. 혁거세왕

 상제가 하룻밤 사이에 선계의 궁전을 짓는 동안, 땅어머니는 진한 땅 동쪽 바닷가를 찾았다. 동악의 계곡물이 모여 동해천을 이루고, 그 물이 다시 동해로 흘러드는 곳이었다. 땅어머니는 그 곳을 동해의 입, 동해구라 이름 짓고 신목을 심었다. 

 첫날, 나무는 땅 속 깊이 여섯 갈래의 뿌리를 뻗어나갔다. 둘째 날, 나무는 길게 길게 가지를 뻗어 올렸다. 셋째 날에는 수만 개의 이파리를 피워냈고 그 다음 날에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서 있었다. 

 뿌리가 가리키는 여섯 방향으로 여섯 고을이 자리를 잡았다.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무산 대수촌 촌장, 자산 진지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에서 백성들은 서로 기대 살았다. 아이가 아이를 낳고 다시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 신목은 하늘에 닿을 듯 우람하게 자라났다.  


 삼월 초하룻날 육 촌의 촌장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다스릴 왕이 필요합니다. 근자에 방자한 백성들이 날뛰며 위아래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여섯 촌장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비추는 땅이 보였다. 양산 밑 나정 곁에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여섯 마을의 촌장은 그곳에서 자줏빛 알을 맞았다. 그 알을 깨뜨리고 사내아이가 나왔다. 온몸에서 빛을 뿜으니, 신목에서도 광채가 흘러나왔다. 새와 짐승이 더불어 춤추고, 땅과 하늘이 흔들렸다. 여섯 마을의 촌장은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이 날 사량리 알영정이라는 우물에서는 계룡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용모는 유달리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 북천에 가서 목욕을 시키니 부리가 떨어졌다. 알영 우물가에서 나았으므로 알영으로 이름 짓고 두 사람을 받들어 길렀다. 


 갑자년에 혁거세는 열세 살이 되었다. 그는 선계를 찾아가 상제를 알현한 뒤, 사로국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알영을 왕비로 맞았다. 혁거세 왕은 어진 왕이었으며, 알영 왕비는 왕을 도와 백성들을 돌보았다. 백성들을 자식처럼 귀히 여기고, 무릎을 낮춰 그들과 눈을 맞추었다. 왕과 왕비는 온 나라를 돌며 농사 짓기를 권하고 뽕나무를 기르게 했다. 가을이 되면 들판에 곡식이 쌓였다. 뽕나무 잎을 먹은 누에는 고운 실을 자아냈다. 사로국 사람들은 고운 비단옷을 입고 배고픔을 면하게 되었다.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나, 혁거세왕의 지혜로움을 알고 되돌아갔다. 사로국에서는 외진 곳에 사는 이들조차 밤도 문을 닫지 않았다. 어둠을 타고 몰래 들어온 자신들이 모습이 부끄러워한 것이다.

 혁거세왕은 다시금 갑자년을 맞았다. 왕은 목욕재계를 하고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알영 왕비가 손수 혁거세왕의 수발을 들었다. 알영 왕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렇게 다시 선계에 드실 준비를 하시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나 또한 그러하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세월이 흘렀다고 생각하니, 믿어지지가 않소이다."


 인간계에서 사는 동안 혁거세 왕은 인간의 나이를 먹었다. 그는 이제 칠십 대의 노인이었다. 얼굴에는 주름이 지고, 머리는 희게 새었다. 하지만 여전히 키가 크고 허리는 꼿꼿했다. 왕비가 왕의 허리에 색실로 만든 띠를 둘러주며 말했다. 

 "왕께서는 그동안 사로국을 무사히 다스리셨습니다. 그러니 상제께서는 약조하신 대로 신물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알영 왕비의 눈가에도 세월이 내려와 앉아 있었다. 늙은 왕비의 눈 속에는 자애로움이 가득했다. 

 "사로국은 아주 작은 나라요. 이웃에 있는 나라들은 호시탐탐 사로국을 노리고 있   소. 상제께서 신물을 내려주신다면 사로국은 크고 강건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   오.“ 

 혁거세왕은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그의 몸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맨 처음 알에서 깨어나던 순간처럼 혁거세 왕의 몸이 뜨거워졌다. 알영 왕비가 왕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선계에 가시면 며칠 동안 머무르십니까?"

 "이번에도 이레 동안 머무르고 올 것 같소."

 "수행을 맡을 이도 없어 걱정이 되옵니다. 홀로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마시오. 이 늙은이를 위해 아마 선계에서 누군가 내려올 것이오."

 왕이 침전 밖으로 나가며 대답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침전 밖에 혁거세 왕의 맏아들 남해가 나와 있었다. 왕자는 혁거세 왕을 닮아 키가 크고 몸이 컸다. 알영 왕비를 닮아 마음에 덕이 있고 지혜로웠다. 왕자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먼 길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알겠다. 남해가 있어 맘 편히 다녀올 수 있겠구나. 너만 믿고 간다."

 "예, 이 곳 걱정은 마십시오." 

 "참, 선계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궁을 비우는 것을 다른 이들이 알아서는 안 될    것이다. 혹시라도 삿된 이들이 알게 되면……"

 "잘 알고 있습니다." 

 남해가 대답했다. 침착한 성격 탓에 말 한 마디 성급하게 뱉는 법이 없었다. 


 선계에 관한 것은 함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인간계과 선계 사이의 균형이 흐트러지면 변고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알영 왕비와 남해 왕자는 조용히 뒤돌아서서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멀리서 방울 소리가 나며 하얀 빛이 왕을 향해 다가왔다. 혁거세 왕은 눈이 부셔서 고개를 돌렸다. 어둠을 뒤로 물리며 하얀 빛이 형체를 드러냈다.  흰말이 왕을 모시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알로 태어난 혁거세 왕을 모시고 인간계로 왔던 바로 그 말이었다. 

 "오랫만이로구나." 

 혁거세왕이 말의 갈기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지난 세월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왕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흰 말은 마치 무릎을 꿇듯 몸을 구부렸다. 혁거세왕은 말 위에 훌쩍 올라앉았다. 

 "이제 그만 가자."

 왕이 말고삐를 가볍게 쳤다. 흰 말은 어둠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선계에서 온 말은 말발굽 소리 대신 방울 소리를 울렸다. 

 성문 밖에 회색 수염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 수염, 자네가 왔구만. 나는 이리 늙었는데 자네는 예전 그대로네." 

 혁거세 왕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회색 수염은 혁거세 왕에게 금척을 만들어준 이였다. 열세 살 적의 혁거세 왕은 대장간에 관심이 많았다. 선녀의 안내를 받아 선계를 두루 구경할 때, 대장간 앞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했던 것이다. 

 회색 수염이 예를 표하고 혁거세 왕을 맞았다. 그는 인간 세상의 한 갑자가 짧은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 선계의 시간은 그저 물처럼 흐를 뿐이었지만 인간 세상의 시간은 사람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인간들이 왜 늙고 병드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상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선계로 드시지요."

 회색 수염이 얼른 현학에 올라탔다. 시간을 지체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날이 새기 전에 사람들 눈에 띄어서도 안 되었다. 


 현학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흰말도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흰 말의 양 쪽 옆구리에서 날개가 서서히 돋아났다. 작은 날개는 이내 독수리 날개처럼 늠름하게 펼쳐졌다. 천마가 발을 두어 번 구르고 날개를 퍼덕거렸다. 검은 학과 하얀 천마는 공중을 향해 나란히 날아올랐다.  

 한참을 날아가니, 먼동이 터 오르기 시작했다. 어둠이 옅어지며 주위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회색 수염은 눈 아래 펼쳐진 풍경에 감탄했다. 넓게 펼쳐진 들판에 여기 저기 곡식 낟가리들이 쌓여 있었다. 창고에 넣어두지 않은 걸 보면 사로국 백성들은 도둑 걱정 없이 사는 모양이었다. 혁거세 왕의 치세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얀 말과 현학이 나란히 산을 넘었다. 빼곡한 나무 사이로 초록색 강줄기가 보였다. 야트막하게 엎드린 산줄기가 일곱 굽이 이어졌다. 일행은 길게 이어진 강줄기를 따라 날았다. 강줄기가 점점 넓어지며, 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겨왔다. 


 이윽고 일행은 툭 터진 바다를 눈 앞에 두고 섰다. 사로국의 동쪽 끝, 바로 동해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검푸른 바다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출렁거렸다. 갈매기들이 바닷가를 향해 날아들었다. 천마가 날갯짓을 하자 갈매기들이 그 주위를 높게 날았다.  


 동해구에는 땅어머니의 신목이 하늘을 떠받치듯 서 있었다. 가지에 매달린 오색 천들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나부꼈다. 혁거세 왕은 잠시 말에서 내렸다. 

 "땅어머니께 고합니다. 사로국의 왕, 혁거세가 선계에 가고자 합니다. 길을 열어 주   십시오."

 혁거세 왕이 두 팔을 높게 들며 소리를 쳤다. 신목에서 '우우우'하는 바람 소리가 나더니 수만 개의 잎들이 몸살을 앓듯 뒤척였다. 곧이어 신목에 걸린 천들이 일제히 서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동풍이 일어난 것이었다. 


 회색 수염은 얼른 먼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무 것도 없던 바다 한가운데 절벽이 불끈 솟아올랐다. 기암 괴석이 좌우로 길게 늘어선 모양이었다. 어느 바위는 사람이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것은 비스듬히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또다른 바위는 호랑이가 꿇어 앉아 있는 형상이었다.  

 먼 바다에서 일어난 파도가 절벽에 와 부딪쳤다. 파도가 넘실대며 물방울을 튕겼다. 하얀 포말이 동쪽 바다 수평선까지 이어졌다. 그 끝에서 바닷물이 용트림을 하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선계로 드는 문이 열렸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이것이 선관과 선인들 눈에만 보이는 절벽이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좀 낯설게 느껴지는군. 좀 어지럽기도 하고."

 혁거세 왕의 목소리에는 진한 피곤이 묻어났다. 노구의 몸으로 천마를 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회색 수염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품 속의 삼화수를 꺼내주었다.

 "진명선인께서 주셨습니다. 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지실 겁니다."

 "이렇게 마음을 써 주시니, 고마울 따름일세."

 회색 수염의 말에 혁거세왕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천마의 등은 너무 딱딱하고 바람은 몹시도 매서웠다. 

 "절벽 넘어 다시 천리 길을 날아가야 합니다. 조금만 힘을 내 주십시오."

 "허허, 내가 늙긴 늙었나 보네. 예전엔 그저 선계에 간다는 생각만으로 설레서, 이 리 멀고 고된 길인지도 몰랐는데……. 그리고 보면 인간계에서 사는 것도 쉽지만   은 않은 일이었어."

 "후회하십니까?"

 회색 수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는 마음만 먹었다면 선계의 높은 관리가 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늙지 않은 명약을 먹으며 영원히 살 수도 있었다. 

 "아니, 난 사로국을 사랑하고, 사로국 백성들을 사랑하네. 그들은 거칠지만 따뜻하고, 어리석은 듯 하지만 하늘의 이치를 알고 있거든."

 혁거세 왕은 멀리 두고 온 금성의 백성들을 떠올렸다. 자신을 성인이라 칭하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혁거세 왕은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꽃을 받아들었다. 코 밑에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향내를 맡자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으며, 지끈거리던 두통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며칠 째 밤잠을 설쳐서 생긴 눈 밑의 그늘도 서서히 없어졌다.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지던 두 다리도 구름을 딛고 있는 것처럼 가벼웠다.

 "한 10년은 젊어진 것 같구만. 아주 쌩쌩해졌어. 선계의 친구들이 보고 싶으니, 어서 가세나."


 헉거세 왕 곁으로 천마가 다가왔다. 방울 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다. 혁거세 왕은 갈기를 한 번 만져주고, 천마에 올랐다. 천마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바다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나는 듯이 절벽 속으로 걸어갔다. 바로 눈 앞에 선계로 가는 길이 훤히 트여 있었다.  

이전 01화 1. 진명선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