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와 이끼
잘츠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눈과 코와 발이 호강한다 생각했다.
신발 속에 갇혀있던 발은 초록 대지 위에서 춤추고,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면 온통 푸른빛으로 물든 나무와 들판... 건물과 기계에 갇힌 시선이 대자유를 느꼈다. 나무가 많으니 늘 촉촉한 공기는 메마른 콧속을 적셔주었다.
한적한 마을에 있던 숙소. 여행의 첫날 아침엔 일어나 숙소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 그 옆으로 넓은 청보리밭이 보였다. 보리밭에 이끌려 가니 초록의 잔디와 키 큰 나무들이 몇 그루 보인다. 시야가 트이니 무작정 맨발로 뛰고 싶었다. 신발을 벗고 초록 대지와의 첫 만남을 가졌다. 가끔 들려오는 새소리 말고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던 초록 세상. 내 키의 몇 배나 되는 나무 곁으로 갔다 담쟁이가 칭칭 감겨 있던 나이가 많은 나무. 나무 곁을 빙빙 돌다 나무를 끌어안다가. 너무도 오랜만에 이끼를 발견했다. 이끼. 아부다비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그 이끼 말이다.
숙소에 머무는 동안 매일 아침 큰 나무를 만나러 갔다. 나무 아래 앉았다가 또 스트레칭을 하며 걷다가. 이끼 위에 손을 얹어 촉촉한 그 느낌을 만끽했다. 나만의 놀이터였던 공간. 아무도 없는 그 공간에 오로지 나와 나무만 있었다. 늘 내게 엄마의 역할, 또 수많은 관계 속에 둘러싸여 무언가를 해내어야만 하는 사람으로만 지내다 아무런 요구 없이 그저 조용히 나를 받아주는 그런 느낌의 나무. 그 아래 오래 머물렀다.
내가 놀던 곳. 어린 시절 동네 포구나무 위에 앉아 놀던 기억이 났다. 나이가 500살도 넘은 아름드리나무.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생각해 보면 나무는 늘 말없이 나와 놀아주던 듬직한 친구이자 언제든 놀러 갈 수 있는 놀이터였다. 티브이에서 ‘햇살나무’라는 만화를 본 기억이 난다. 내 인터넷 닉네임이기도 한 햇살나무. 이곳 여행지에서 만난 나무와 나. 나이 40이 넘어 어린 시절의 정현이 되어 나무와 함께 놀았다. 늘 자연은 위로를 준다. 말없는 위로라. 그 곁에 잠잠히 머물러 보면 느껴지는 그런 소리 없는 위로가 있다.
다음날 아이들과 할슈타트에 갔다. 엽서에 나올법한 호수를 낀 예쁜 마을이라고, 소금광산이 유명하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별 기대 없이 갔다. 할슈타트의 예쁜 마을과 나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끼며 그저 아이들과 걷다와야지 하고 갔다. 주차장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할슈타트 초입이 보였다. 저 멀리 예쁜 마을도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입구에서 멈추고 말았다. 입구에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있었다. 놀이기구는 많이 없었지만 잔디 위에 작은 짚라인과 그네가 있었다.
숙소 놀이터도 그랬지만 잘츠부르크 놀이터는 대부분 나무 놀이터였다. 자연친화적인 분위기와 그러한 소재들로 만든 놀이터가 참 맘에 들었다. 아이들은 그곳을 너무도 좋아했다. 특히 둘째 은유는 하루 종일 두어도 놀 것만 같았다. 짚라인을 타고 내려오며 소리를 지르던 은유는 아기 타잔 같았다. 나도 한번 타볼까? 하며 짚라인에 올랐다. 공중을 나는 기분. 새들은 매일 이런 기분으로 살까? 우리는 맨발의 타잔이 되어 한참을 놀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은서는 휴대폰을 놓지 못했지만 우리는 각자의 놀이를 존중했다.
마을 안쪽 구경을 해볼까 하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은유는 걷는 내내 놀이터에 다시 언제 갈 거냐 물었고 마을 안 기념품 가게와 식당을 들렀다가 얼른 서둘러 다시 놀이터로 왔다. 오후 땡볕이 내려 쬐니 웃통을 벗은 청년들이 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걸 본 은유는 자기도 물에 들어가겠다 했다. 팬티바람의 은유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흙에 미끄러져 옷을 다 버리고 그 김에 첨벙거리며 물놀이를 즐겼다. 호수 위 고목나무 둥치는 멋진 배가 되었다. 나무배를 탄 아이의 뒤에 책 읽고 있는 청년이 멋들어졌다.
호수에 백조가 보였다. 아이들은 먹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백조에게 나눠줬다. 잘츠부르크 친구 백조.
대화를 하며 놀던 아이들!
아부다비 도심 속에서 1인 4만 원을 주고 입장하던 놀이터가 떠올랐다. 자연은 늘 우리에게 놀거리 먹을거리를 이렇게나 내어주는데 우리는 놀이에도 돈을 쓰며 사는구나 싶었다. 초록의 놀이터. 곧 돌아갈 경주의 초록 텃밭 놀이터가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었다. 창 아래 지붕에 무언가 붙어있는 게 보였다. 뭘까 하며 자세히 보니 여행 첫날 나무 곁에 놀다 본 이끼였다. 지붕 여기저기 이끼가 보였다. 여행 내내 내가 유심히 본건 가문비나무와 이끼였다. 알프스 산맥의 끝자락에 있는 잘츠부르크는 숲, 나무, 햇볕과 적절한 그늘, 석조건물과 시원하고 습한 기후덕에 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 그리고 이끼가 자라기 너무도 좋은 환경 같았다.
아이들과 걷다가도 이끼에 손을 얹어 톡톡 두드려보고 맨발로 걷다 이끼 위를 사뿐히 밟아보기도 했다. 현관 앞 신발 터는 깔개와는 차원이 다른 융단. 이끼.
아부다비의 기후와 정반대인 곳에서 메마른 몸이 수분을 머금어 내 몸에서도 이끼 같은 무언가가 자라진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상상도 해보았다. 이끼를 밟으며 걷다 숙소 옆 조그만 정원의 식물들을 유심히 보았다. 역시나 별기대가 없었는데 아이들이 타는 흔들 말 아래에 낯익은 잎이 보였다. 앗, 딸기나무다. 자세히 보니 초록의 딸기가 몇 개 열려있고, 그중 하나는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여행 마지막 날 쯤은 저 딸기를 먹을 수 있겠지? 했다.
또 걷다 보니 약간 뿌연 느낌의 잎이 보였다. 저것도 낯익은데? 하며 가까이 가보니 웬걸. 라벤더였다. 작은 꽃봉오리들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손가락으로 줄기를 쓸어 코에 가져다대니 너무도 오랜만에 맡아보는 생 라벤더 향… 그리움이 묻은 그 향. 높은 건물을 바라보며 살다가 잘츠부르크 초록에 이끌려 시선을 낮추니 작고 아름다운 생명들이 보였다. 향기로운 꽃도, 먹음직한 열매도 숨어있는 초록의 공간.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이렇게 향기롭고 먹음직한 식물들이 가득한 그야말로 천국 같은 곳에서 살았겠지?
그때는 이끼가 잔디처럼 가득했을까? 멀리 가문비나무들이 보인다. 나는 고다 아야의 <나무>를 읽고 있다. 곧 가문비나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