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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Nov 08. 2022

나는 지금도 화가 난다

   지금은 11월, 오늘 현재 기온은 3℃, 공기는 차갑고 머리는 맑다. 양지천 위에서 백로가 날아오르더니 가까스로 나무에 올라앉았다. 낙엽은 도로를 굴러다니고 냇물은 차갑게 속을 내비치고 있다. 그 많던 물이 잦아든 걸 보니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 


  그때와 날씨가 너무 달라 느낌이 다를 텐데, 왜 아직도 분노와 슬픈 기억이 남아있는 걸까? 그때는 짙푸른 멍 빛이었다면 지금은 누렇게 변한 상태이긴 하지만. 

    

  2014년 4월 16일,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아이들이 세월호와 함께 침몰하던 당시는 우리 학교서도 그쪽으로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계획을 세우던 때였다. 그날 침몰 소식은 수업 중이던 우리에게도 들렸고 그럴 리 없다고 도리질 치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TV에서는 뒤집힌 배가 보이는 것이었다.     


  학교 수학여행은 당장 취소되었다.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날고 우리는 물 위로 올라온 배 한쪽 귀퉁이를 바라보며, 사람들이 그쪽에 몰려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재빨리 구조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날 2시가 넘어가도 그 이후에도 구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 배가 가라앉기 전에, 얼른. 얼른......’ 


  맘속으로 대뇌며 수업을 마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저녁때도 마찬가지였다. 구조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아무런 변화 없이 밤을 맞았다.   

  

  무슨 기도를 어떻게 했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기도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 새벽 3시경, 나도 모르게 우왕하고 울며 깨어났다. 내가 배 속에서 목만 내밀고 있는데 갑자기 물이 확 불어닥쳐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꿈을 꿨기 때문이다. 그때 잠에서 깨어나면서 직감적으로 아, 그 속에 남아있던 아이들이 다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뒷날 학교식당에서 60대이신 국어선생님을 만났다. 그분이 내 앞에서 밥을 먹는데 자기와 친한 선생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 친한 동료끼리 만났을 때 그 교사가 자기는 비담임이지만, 단원고 수학여행 인솔 교사로 참여한다고 했다면서,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우리는 모두 나도 그 한 사람이고 그렇게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분개했다. 마음이 뒤숭숭했고 며칠이 지나도록 달라지는 것이 없자, 슬프고 화가 나고 우울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어떻게 배 안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해보지 않고 헬리콥터만 빙빙 돌리다 만단 말인가? 어떻게 단한사람도 살릴 수 없었나? 의문은 분노로 바뀌고 뭔가 잔뜩 억울한 듯한 기분으로 살았다. 기계적으로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상생활은 영위하면서도 심리적으로는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해지는 것이었다.

     

  자기만 살려고 배 밖으로 도망쳐 나온 세월호 선장을 밤사이에 비밀히 모셔(?)가는 행위나 모호하고 뭔가 께름칙한 행동으로 일관하는 정부의 대처를 보면서, 이게 국가인가? 뭐 이런 정부가, 대통령이 다 있지? 그런 분노가 내 마음속 가득히 흐르고 있었다. 내 수업을 받는 아이들에게도 해줄 말이 없었다. 미안했다.      


  그러다가 4월 말인가? 5월인가? 시간이 더 흘렀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직원협의회가 있던 날이었다. 먼저 교장이 단상에 올라서더니 자기는 어떤 일이 있을 때, 특히 자신이 사소한 잘못이라도 느껴지면 헌금을 많이 한다면서, 이번 교장단 회의에서 세월호 학생들을 추모하는 재단 설립을 위한 기금을 마련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기금이라는 것이 앞으로 학생 중에 장학생을 선발해서 장학금 등을 주는데 쓴다는 것이었다.     

 

  당시, 가슴 쓰라려하는 세월호 부모들의 절절한 광경을 TV로 보면서, 진정성이 떨어지는 대통령의 사과를 보면서 분노하고 있던 나는 일어서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지금은 진정성이 있는 사과가 먼저이고 세월호 가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먼저 아닙니까? 그것과 상관없이 특정 학생을 선발해서 장학금을 주도록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발적으로 교사들의 기금이 모일 것 같지 않자, 미리 대책 회의를 했는지, 교무부장이 일어나 그 기금에 쓰일 돈은 교사들이 이미 내었던 상조회비를 그쪽으로 지출한다는 것이었다. 내 의견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없음은 물론이었고 다른 교사들의 의견을 들어볼 생각도 없었다. 교장 앞에서 교사들이 대놓고 반발하지 못할 것을 알고, 월급 때마다 갹출하여 교사들이 경조사에 쓰일 상조회비를 제멋대로 운용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반대를 했지만,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교장의 뜻대로 그해 상조회비의 일부는 세월호 장학재단(?)으로 들어갔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돈을 걷어가 버린 것에 대해 화가 난다. 그리고 그 장학재단이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을 밝히고 그에 맞는 대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두루뭉수리하게 일 처리를 하는 그런 공직자들이 싫다.    

 

  이번에도 이태원에서 할로윈 참사가 일어났다. 160여명 가까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중에 세월호 또래의 젊은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8년이나 지났다.그런데 이번에도 그렇게 죽어갈 동안 아무런 대책 없이 방치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만큼 끔찍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신고가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대처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때와 똑같다. 


  이 10월, 11월에 세월호가 생각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어찌 이리 비슷한 기분이 드는 걸까?   

  

  왜 이런 참사가 발생했는지, 누가 책임져야 할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럼에도 어쩌면 공직자 중에 상처가 난 곳을 쳐다보고 그곳을 치료할 생각은 않고 엉뚱한 주변부를 긁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을지 모른다. 그때 그 교장단인가? 뭔가 하는 단체가 회의해서 만들어낸 그 대책처럼. 제발 그런 일은 더이상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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