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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Mar 12. 2021

감귤 따던 날

  봉고차는 덜렁거리며 흙길을 달렸다. 저청리를 지나자 포장된 길은 사라지고 중산간에 있는 샛길로 들어섰다. 쓸쓸한 겨울바람이 휑한 나무들을 가볍게 흔드는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언니들과 함께 큰아버지네 과수원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날 감귤을 딸 일꾼으로 차출된 사람은 나, 사라, 소피아 언니와, 큰 아버지네 태혁, 상혁오빠까지 다섯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귤 하나 안 주시더니, 일손이 급하니까 그렇게 불려가는 것에 나는 속으로 불뚱거리고 있었다. ‘어머니 말씀이 아니면 안 갔을 텐데.’


  차는 큰길을 지나고도 샛길을 여럿 건너서야 큰아버지 과수원에 도착했다. 과수원에는 창고가 몇 개 있었고 창고 주변에는 여러 가지 농기구들이 내팽개쳐 있다. 멀뚱히 바라보니 바닥에는 커다란 욕조 같은 고무통이 보였다. 

  ‘저 안을 가득 채우겠지. 저런 통들이 몇 개나 있을까? 감귤의 크기가 작지 않기에 망정이지.’


  나는 오빠들을 따라 방풍림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키 작은 감귤 나무들이 빼곡히 있었는데, 초록 잎 사이로 주렁주렁 달린 노란 감귤이 보였다. 겨울에도 생생한 초록빛이 있는 게 참 좋았다.

  그런데 귤은 어찌 딴담. 첨엔 그냥 알맹이를 손으로 잡아 뜯었다. 그랬더니 우리 중 맏이인 태혁 오빠가 말렸다.

  “정아, 겅 따문 안 되고 정정 가위를 들고, 가지 끝 밑동만 살짝 잘라라.”

  그래야 귤은 상품이 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귤을 골라 따는 작업은 오래 걸렸다.

  “정아, 여기 와서 귤 먹어봤어? 이럴 때 실컷 먹어라” 

  한참을 따고 있으니 태혁 오빠가 말한다. 눈치 보느라 못 먹고 있었는데 아, 잘됐다. 귤을 먹어보라니 그것도 배 터지게! 

  1970년대만 하더라도 귤나무는 대학나무라 불릴 만큼 귤이 귀했던 시절 얘기다.    


  맨 처음 내 입에 들어갈 녀석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떤 게 맛있담? 오빠가 가르쳐 준 대로 붉은빛 도는 노란 색깔의 덩치 큰 놈을 덥석 잡았다. 그놈에게 코를 들이대고 흠흠 냄새를 맡았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따자마자 그 자리에서 껍질을 까 버리고 몇 겹을 입에 털어 넣고 씹었다. 달콤한 즙이 목구멍을 타고 쭈르르 흘렀다. 갑자기 귤 따는 일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담부터 나는 귤을 따면서 먹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자 점점 달콤함이 줄어드는 대신 배는 귤로 가득 찼다. 드디어 오줌이 마려웠다. 어디서 오줌을 싸야 하나? 벌써 우리는 창고가 있는 곳에서 멀리 와 있는데. 나는 쑥스러워 사라 언니에게 물었다.

  “오빠, 어디서 쉬해야 해?” 

  언니가 태혁 오빠께 물었다.

  “여기서.” 

  오빠는 땅바닥을 가리켰다. 나는 오빠들이 안 보이는 귤나무를 찾아서 한참을 걸어갔다. 그리곤 귤나무가 에워 싸여 있는 틈 사이로 누가 볼까 봐 조심하며 볼일을 보았다. 쏴아~ 마치 송아지가 오줌싸는 것 같다. 귤을 많이 먹은 터라 오줌의 양은 대단했다.   

  

  종일 따야 하는 귤의 양은 엄청 났다. 익은 것만 따더라도 귤밭 하나를 건너니 또 다른 귤밭이, 건너면 또 다른 게 있었다. 돌아 돌아 걷기만 해도 다리가 지칠 판이었다. ‘맙소사! 이 많은 걸 해야 하다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상혁오빠가 형인 태혁오빠에게 말을 건냈다.    “대장이 오늘 이만큼 하면 잘했다 하려나?”

  “언제 대장이 뭐 그렇게 칭찬을......”

  나는 오빠들의 말을 쫓아 들으면서 속으로 ‘대장이 누구지? 대장이?’ 그러고 있었다. 말하는 맥락을 보니, 대장은 바로 큰아버지를 일컫는 말이었다. 속으로 나는 그게 참 이상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본에 계셔서 한번을 못 뵈어도 아버지라 부르건만, 오빠들은 매일 대하는 자기 아버지보고 대장이라 한다. 왜 그럴까?     


  큰아버지는 시골 면장이셨다. 1960년 초까지는 첩을 갖는 일이 창피한 줄도 모르던 세상이라, 출장을 가면 자꾸 일을 만들었다. 병약한 큰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로 부인을 들였는데 그게 태혁 오빠의 엄마였다. 그 후에도 바람을 피워서 상혁이 오빠를 낳았다. 그렇게 잦은 바람을 피우다 안방을 차지하게 된 마지막 큰어머니는 딸만 낳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손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재산을 큰아버지께 물려주었다. 그 덕에 만평의 넘은 과수원도 큰아버지 것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오빠들의 처지는 괜찮았나 보았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다니던 태혁오빠는 동네 가요제 무대에서 가죽 재킷과 긴 부츠를 신고 노래를 불렀다. 남진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를 외치면, 젊은 처녀들은 열광적으로 반응할 만큼 인기도 좋았다. 그러던 오빠가 대학을 중퇴하고 가수의 꿈도 접어버리게 되었던 데는 큰어머니 입김이 컸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처지가 달라졌던 것이다. 


  큰어머니는 늘 당신 딸을 “우리 미스코리아”라고 부르며 시골에서 보기 힘든 예쁜 옷을 입혔다. 게다가 우리 시골 마을에는 없는 선생님까지 초빙해서 피아노 레슨을 시키셨다. 어쩌면 이런 차별이 대장이라 부르게 된 이유인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배다른 두 오빠의 사이는 좋아 보였다. 공동의 불만이 있어서였을까? 아버지를 대장이라 부르는 그 사정이, 언제나 귤을 맘껏 먹지 못하는 내 처지보다 더 안되어 보였다.    


  저녁 늦게야 봉고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물론 우리는 빈손이었다. 그래도 아침에는 오빠들과 함께 차를 탄 게 참 어색하더니, 저녁엔 웃으며 서로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나마 종일 귤을 따면서 얻은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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