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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Mar 10. 2023

인어공주와 어머니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보고 있다가 앉은 채로 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얼핏 지나간 내용을 보니 한참 졸았나 보다. 그 동영상이 특별히 재미없거나 졸리게 하는 강의는 아니었는데도 앉아서 졸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학교 4학년 초여름날, 교실 창문으로 햇살과 함께 넉넉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지만 막 청소 후라 교실은 먼지와 걸레 냄새로 쾨쾨했다. 그때 나는 당번이었던 것 같다. 책상을 정리하고 나서 교실을 휘둘러 보는데, 교실 옆벽에 신발장처럼 긴 거치대가 눈에 띄었다. 그 안에는 동화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때 동화책을 처음 봤다. 언제부터 교실로 들어와 앉았을까? 시골이라 책이라곤 만화방에서 빌려주는 만화가 전부였었는데 색깔도 예쁜 동화책이라니...... 내가 보던 만화는 한결같이 명랑 소녀가 등장하여 맹활약 후 늘 행복한 결말을 맞았었다. 만화를 실컷 볼 수 있는 날은 행복했으며 어두컴컴한 만화방 주인이 되고 싶을 만큼 나는 만화에 깊게 빠져있었다.     


  동화책을 발견한 순간, 그 책들을 꺼내어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날 마지막으로 손에 든 책이 ‘인어공주’였다. 나는 곧 인어공주에 빠져들었다. 인어공주가 자신의 목소리 대신 얻은 다리로 걸을 때, 살을 에인 듯한 아픔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게 뭔지 잘 모르면서도 나도 쓰라림을 느꼈다. 왕자와 같이 궁으로 갈 때는 행복한 기대에 들뜨기도 했다가 자꾸 어긋날 때마다 내 마음은 안타깝고 발바닥이 간질간질해졌다. 마침내 왕자와 결혼할 수 없게 되고 언니들이 머리칼을 팔아 단도를 마련했을 때, 과연 인어공주가 왕자를 찌를 수 있을지, 내 마음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결국, 인어공주는 물거품으로 변해버렸다. 물거품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면서도 물거품이라, 물거품이라 속으로 대뇌는 데 허무가 밀려왔다. 

  내가 놀던 바다는 검은 바위 위로 파도가 덮치면 하얗게 부서지면서 물방울이 튀었었다. 그런 물방울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맨 처음으로 알게 된 비극에 젖어 어쩔 줄 몰랐다. 마음 밑바닥부터 저리고 외롭고 쓸쓸해졌다. 


  때마침 교실 문이 닫히고 나는 운동장을 빠져나와 혼자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닷가 쪽의 하늘이 붉게 변하더니, 색깔이 바래면서 천천히 어두워져 갔다. 노을빛이 사라지는 것이 인어공주가 서서히 물거품으로 없어지는 것처럼 느껴져 내 마음은 슬픔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물거품으로 변한 인어공주가 혹시나 저 바닷물 속에서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 하여 바다를 바라보다 집으로 향하였다.


  꿈속을 헤매듯 몽롱한 슬픔에 젖어 발길을 끌며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대문을 연 순간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찬 바람만 마당 가득 불어 나왔다. 저녁 이슬이 내리도록 어머니는 밭일을 끝내지 못했고 부엌에는 텅 빈 솥만이 민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무함과 슬픔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인어공주로 인한 슬픔에다 비어있는 집에 대한 두려움까지 더해져 나는 다시 마당으로 나갔다, 외양간에는 큰 어미 소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소는 둥그런 눈을 멀뚱멀뚱 굴리며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꼬리치며 반가워하는 메리(강아지)와 함께 종종 걸음을 치며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이 오래도록 내 주위에 머물렀다.      


  삐걱하는 대문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나는 얼른 달려가 어머니 옷자락을 붙잡았다. 느지막이 동생과 함께 돌아오신 어머니 옷에서 흙냄새가 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머니는 부엌에 들어가서 밥을 지으셨다. 여느 날처럼 우리는 밥상에 모여앉아 양푼이 보리밥과 된장국과 그리고 김치를 먹었다. 함께 딸그락거리며 양푼이에 숟가락을 얹을 때마다 내 가슴에 있던 외로움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나는 슬펐다.      


  식사를 마치자 어머니께 인어공주 때문에 슬프다고, 허전하고 외롭다고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깐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어머니는 홀로 앉아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시작했다. 구멍 난 양말 사이로 어머니의 발가락이 삐져나왔다. 나는 어머니가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 문득 5년이 넘도록 아버지 없이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면서 우리를 돌보고 있던 어머니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하아’ 하고 한숨이 쉬어졌다. 분명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 때문에 슬펐는데, 어머니를 보니 차마 슬프다고만 말할 수 없는, 어딘가 막힌 듯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치밀어올랐다.


  성모송을 암송하시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다가 잦아졌다. 어머니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어머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머니는 기도하다가 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어머니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물러나 앉았다.      


  어머니 모습을 떠올릴 때면 나는 아직도 몸빼 바지와 함께 기도시간이 쉬는 시간일 만큼 종종거리던 흙냄새 나는 젊은 어머니를 기억한다. 안정적으로 살만큼 세월이 흐르고 난 뒤, TV를 보다 스르르 눈이 감기고 드디어는 꾸벅꾸벅 졸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털면서 다시 고개를 드시던 히뿌연 머리칼의 어머니 모습도 떠오른다.      


  이제 어느새 세월이 흘러 나도 유튜브를 틀어놓고 조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역시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더니 인생에 서서히 저녁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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