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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Feb 26. 2023

자기는 고등어

  이번에 남편이 새로 사 온 샴푸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탈모 방지 샴푸라서 그렇다는데 나는 영 탐탁지 않다. 왼손바닥에 샴푸를 떨어뜨렸는데 투명한 게 주방 세제를 보는 것 같다. 슬프다.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맨 처음 샴푸를 대하던 그때가......     


  “너, 샴푸로 감아시냐? 향기가 참 진하고 좋네이”     


  나는 3층 교실 넘어 옥상으로 통하는 작은 공간에서 혼자 공부하고 있었다. 그곳은 하얀색 칠을 한 외진 통로였는데, 복도와 이어진 계단을 다 올라오기까지는 아무도 누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누가 오리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던 터였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동철이었다. 놀라 돌아보다가 내 얼굴이 맞닿을 만큼 내 뒤에 다가서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다정한 눈길에 미소 띤 얼굴, 급당황한 나는  동철의 말에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뭐 샴푸? 내가 발랐는 걸 알았을까? 혹시 뭔가 잘못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어쩔 줄 몰랐다. 동철이 말한 ‘향기가 진하다’는 얘기가 내 뇌리에 푹 찔러 넣어졌다. 


  그날도 나는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서 다리를 벌리고 머리를 처박았다. 그런 다음 힘차게 다이알(세수) 비누를 머리칼에 칠하고서 벅벅 문질러 머리를 감아댔다. 그리고서 비누로 뻑뻑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하려고 식초를 찾다가 우연히 샴푸를 발견했다. 취직한 언니가 돈을 벌게 되자 집에 조그만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샴푸도 그중 하나였다. 샴푸는 식초병 옆에 있었다. 호기심에 열어봤던 샴푸통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나는 우선 식초로 머리를 행군 다음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고선 향기 좋으라고 샴푸를 머리에 발랐던 것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 우리는 비누로 머리를 감았었다. 


  그날 동철의 말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 샴푸 사용법을 읽고서야, 샴푸는 ‘바르는 게 아니라 머리를 감는 데 쓰인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동철이가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그 당시는 남녀 공학이었어도 드러내놓고 사귀는 애들은 없었고 서로 관심이 있으면서도 짐짓 무심한 척 지냈던 세대였다.     

  동철은 우리 학년에서 훤칠하게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성적도 비교적 상위권이었으나 그저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운동도 잘했다. 힘도 깡도 있어서 교내 말썽쟁이들도 쉽사리 대하지 못하는 그런 친구였다. 같은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올 때까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가 그 사건으로 내가 바뀔 줄이야! 그에게 관심이 생기자 나는 은근히 속으로 애가 달았다.     

 

  같은 중학교지만 동철이는 남자반이었고 나는 여자반이어서 자주 볼 수 없었다. 어쩌다 점심시간에 동철이가 운동장에서 공을 찰 때면 나는 안 보는 척하면서 은근히 눈길로 쫓곤 했다. 점심시간에 생활지도부원으로 활동하는 그 애가 교사(校舍)를 한 바퀴를 휘돌아 나갈 때면 나도 교실 밖으로 나가 수돗가에서 손을 씻는 척하며 이곳저곳으로 눈길을 돌리곤 했다.


   어느 일요일에 평소보다 늦게 학교에 갔다. 그때는 고교 입시가 있는 때라 일요일도 원하는 학생은 학교에 공부하러 가곤 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일직을 하시던 가정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인사하자 선생님은 내려오시다 불쾌한 표정을 띤 채로 말을 하셨다.   

  

  “동철이랑 옥희가 서로 사귀냐? 아니 무슨 칠판에다 그런 말을 써?”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면서도 3층까지 올라갈 동안 동철일 본다는 생각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교실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옥희가 웃으며 먼저 뛰어나갔고 동철이가 옥희를 잡으러 뒤쫓아 뛰어갔다. 그들이 나가고 칠판을 쳐다본 순간 나는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지녁은 고등어.(자기는 고등어)’     


 예쁜 옥희의 글씨체로 칠판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당시 드라마에서 갖 결혼한 여자가 남편에게 “자기야~”하고 부르는 게 뜨면서 막 유행을 했던 때였다.      


  ‘어? 자기라니? 쟤네가 저런 사이였나? 언제 그렇게 되었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본 것 같지도 않은데......’

 갑자기 내 가슴에서 싸한 바람이 불어 나갔다.     


  옥희는 초등학교 때 늘 나와 붙어 다니던 내 친한 친구였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보고 ‘자기’라고 한 것이다. 옥희는 콧날이 오똑하고 예뻤으며 전교 1등을 했을 만큼 공부도 잘했다. 


  그날 이후 나는 이를 갈며 공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학기 말 고사에서 드디어 옥희 성적을 앞질렀다. 동철의 성적은 나보다 한참 아래였다. 보상이 이루어진 것도 같았지만 뭔가 허전했다. 나중에 둘이 특별한 관계가 아니게 되었을 때도 내 텅 빈 마음은 그대로였다. 졸업할 때까지 옥희의 성적이 나를 앞지르지 못했는데도 나는 서럽고 허무하고 쓸쓸했다. 아무도 모르게 앓았던 내 마음은 학교가 바뀔 때까지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어릴 적 그 풋풋했던 나의 감정, 배신감, 쓸쓸함 그 모든 게 버무려졌던 것이 샴푸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샴푸에서 향기가 없어져 버렸다니! 샴푸의 향기에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이, 추억이 함께 배어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향기조차 뒤집어쓰는 게 사치라니 서럽지 않을 수 있으랴. 안된다. 어떻게든 샴푸를 바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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