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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Mar 24. 2023

삼총사의 추억은 가고

  선영 어머니 부고 문자를 보고 비행기를 타고 내려갔다. 코로나 때문인지 부조금만 전달하는 분위기여서 친척들을 제외하곤 몇 사람 없었다. 삼총사였던 옥희는 공직자라 참석할 수 없다며 오지 않았다.


  선영의 어머니는 10년이 넘도록 요양병원에 누워있다가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산 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기에 그런지 선영은 울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선영 어머니는 잔잔하게 웃으시던 젊은 아줌마셨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다.


  “우리 옥희랑 친하게 잘 지내라이. 우리 옥희는 공부도 잘 허매”     


  햇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 쪼그려 앉아 체육 수업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소리에 놀라 뒤돌아 쳐다보니 똘똘하고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서 있었다. 


  옥희는 나처럼 키가 작았고 어쩌다 선영이와 앞뒤로 앉게 되면서 우리 셋은 친해졌다. 우리는 서로의 집을 돌아다니며 놀고 공부하고 잠도 같이 잤다.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봄날, 우리는 그렇게 삼총사가 되었다.  

    

  셋이 어울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공부는커녕 숙제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는 연필로 책상 위에 그림을 그리기 일쑤였고, 그리다 지치면 지우개로 지우다, 지우개 똥을 모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옥희의 방에 꽂힌 황금색 계몽사의 위인전을 한 권씩 빌려보면서 나도 책을 읽고 공부하는 맛에 빠지게 되었다.


  지금도 맨 처음 숙제하던 날이 생각난다. 그날 숙제는 우리나라 지도 그리기였다. 선영이네 집 공부방에 앉아서 놀다가 옥희가 “숙제해야지!”라고 말하더니 가방에서 책과 공책을 꺼내었다. 그러더니 두 친구는 열심히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도 따라서 지도를 그리다가 잠들었고, 뒷날 혼자 친구들의 숙제를 보며 지도를 완성했었다. 그 후부터 꼬박꼬박 숙제를 챙기게 되었으니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삼총사 덕분이다. 


  우리가 좋아했던 공통의 취미는 만화 보기였다. 그것은 주로 자유로왔던 우리 집에서 이루어졌다. 학교가 끝나면 각자 집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 집으로 모인 다음 함께 돈을 모아 만화를 빌리러 갔다. 만화 가게는 우리 집에서 1km쯤 떨어진 두모리에 있었다. 좋아하는 만화를 잔뜩 안고 함께 걸어올 때면 마음이 뿌듯했고 보고 난 후 깔깔거리며 얘기하는 것이 더없이 좋았었다. 


  어느 날 만화를 빌려서 돌아오는데 우리 반 남학생 세 명이 갑자기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서워 달아났다. 한참을 달리는데 그중 한 애가 모래를 뿌렸다. 


  “아야” 


  달리던 옥희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울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들은 슬금슬금 움직이더니 도망가버렸다. 나와 선영이가 만화를 내려놓고 옥희에게 가보니 얼굴이 마치 곰보 자국처럼 움푹움푹 들어가 있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갔던 부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일을 겪은 다음부터 만화를 빌려다 보는 일은 시들해졌다. 대신 우리는 은행 놀이를 했다. 종이에 잔뜩 숫자를 써서 돈을 만든 다음 서로 가게 주인과 손님이 되어 물건을 사고판다. 사고파는 놀이를 계속할수록 돈은 돌고 돌면서 쌓여갔다. 맨 나중에 누가 얼마나 많이 모았는지 알아보는 것으로 게임은 끝이 났다.      


  5학년 어느 가을날, 옥희네 집인 관사에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나와 선영이는 철문을 밀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철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옥희야, 옥희야!”


  나는 크게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 잠시 뒤 옥희가 나오더니 문을 열었다가 샐쭉한 얼굴로 문을 닫고는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옥희와 선영이가 말다툼을 했다. 옥희가 토라져 교실 밖으로 나갔다. 둘 사이의 냉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내가 맘속으로 허둥거리고 있을 때 선영이가 내게 말했다.  

   

   “그날 옥희가 문을 닫았잖아. 그거 너가 옥희보다 시험을 잘 봐서, 가이 성질난 겅헌 거라.” (걔가 성질이 나서 그런 거야)     


  친구들과 사이좋게 노는 것 외에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우리 반에서 1등은 늘 옥희였는데 어쩌다 한번 내가 1등을 한 탓에 친구의 우정을 깰뻔한 것 아닌가? 다행인지 그 후로도 옥희의 질주는 계속되었고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놀고 우리집 밭일까지 함께 했다. 그러나 중학교에 가면서 삼총사의 우정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나이가 들면서 옛 친구가 그리워진 나는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두 사람을 불러내어 함께 만나길 시도하였다. 그러나 왠일인지 옥희는 자꾸 선영에게 꼬장꼬장하게 굴었고 선영이 함께 만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따로따로 만나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연락하면 언제든지 나에게 맞추어서 환영해주는 선영과 달리 옥희는 시큰둥한 것 같았다. 

    

  문상한 뒷날, 옥희에게 연락했을 때도, 옥희는 자신이 볼일을 보던 곳으로 나를 불러냈다.


  “어따, 너 잘도 맹심했져이. 서울서 여기까지 다 오고.”

 (너 잘도 친구를 깊이 생각했구나. 서울서 여기까지 문상을 다 오고)  

   

 면박을 주는 것 같은 옥희의 얘기에, 나는 올 때마다 선영이가 나를 잘 맞아주었다며 서둘러 변명하듯 대답했다. 그날 옥희를 만나러 가면서 나는 오랜만에 옥희랑 둘이서 차를 마실 생각에 마음이 흐뭇했었다. 그러나 다른 동창들과 섞여 앉아 몇 마디 잡담을 주고받다가 시답잖은 TV 드라마를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옥희와 오붓이 어렸을 적 삼총사의 추억을 되살리려 했던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신제주에서 돌아오던 길에 옥희와 같이 택시를 탔다. 옥희는 자신이 투자한 원룸 얘기를 했다. 창밖은 검은 어둠이 내렸고 내달리는 차는 어디로 가는지, 내 마음은 어리둥절한데 옥희의 얘기가 끝날 무렵 택시는 옥희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나 택시비 내시 난, 나머지 너네 친정집 가는 거까지만 내믄 돼”     


  나보다 먼저 자기 집으로 향하는 옥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쓸쓸히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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