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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Jul 06. 2023

동서의 시신(屍身)

  그녀의 얼굴은 수건으로 뒤덮인 채 몸은 희다 못해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며 그녀의 팔을 만진 순간, 축축하고 차가웠다. 냉장고 안에 통째로 들어간 고깃덩어리에 손대는 것처럼.


  장의사는 침착하게 끈 하나조차도 규정대로 맞춰가며 옷을 입혔다. 황천길로 가는 마지막 길은 황색 수의 한 벌에 황색 꽃신이 전부인데, 그것조차 남의 손으로 얻어 입는 거였다. 옷을 다 입히고 나자, 얼굴의 수건을 벗겨냈다. 동서는 눈을 감고 자는 듯 누워있었다. 장의사가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리곤 조카더러 양손을 동서의 뺨에 대고 쓸어주라고 했다. 


  늘 열기가 많아 얼굴이 벌건 장조카가 두툼한 두 손을 동서의 얼굴에 얹었다. 장조카가 오열하며 잠시 머무는 동안 뜨거운 조카 손의 열기가 더해져선지 창백했던 피부에 혈색이 돌았다. 장의사는 마지막으로 입술을 깨끗이 매만지고 머리 손질까지 끝내고 나자 머리에 베개를 받치더니 두건을 씌워 내렸다. 그렇게 염은 끝났다.


 시신이 관으로 옮겨지자 우리는 관에 국화꽃을 한 송이씩 넣으면서 이별을 하였다. 관문이 닫히고 밖에 고인의 이름이 쓰인 후, 관은 다시 냉장고로 옮겨졌다. 화장할 때까지 그곳에 뉘어 있을 터였다.   

   

  동서가 암이란 소식을 듣고 원주에 있는 병원을 찾은 것은, 2019년 겨울이었다. 동서가 사망하기 몇 달 전이다. 동서의 나이는 80 즈음이었고 대장암 말기였다. 집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기에 작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거였다. 그곳은 일반병동 6인실이었는데 내가 봉사활동을 갔던 암 병동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병실이 복잡하고 어수선한 가운데 동서는 자고 있었다. 


  남편과 내가 다가가자 동서는 잠에서 깨어났다. 얼굴에는 눈곱이 끼어 있었고 영문도 모르고 병원에 입원한 사람처럼 그냥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불치 상태의 암인지도 몰랐다. 우리가 갔을 당시는 조카도 간병인도 없었다. 이렇게 홀로 내버려 두어도 되나? 푸석한 얼굴이 안쓰러워 대야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수건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가진 손수건을 비누로 빨아서 얼굴과 손을 닦아드렸다. 그리고 가만가만 마사지로 등을 펴 드렸다. 그녀는 덤덤히 받더니 도로 누웠다. 시어머니에 대한 문제로 오랫동안 관계가 불편했었는데 그날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내 마음도 서서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그녀를 배려한 일이었고 그날이 내가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그녀를 본 날이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산 지 7년이 지날 무렵, 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큰댁으로 갔었다. 가기 전부터 마음을 단단히 별렀다.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못을 박아야 한다. ‘큰 형님이 맡으라!’고. 타지방으로 전근 가서 남편과 떨어져서 살게 되는 순간까지,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싶지는 않았다. 시앗 때문에 떠돌게 된 시어머니의 처지가 불쌍했지만, 더는 함께 살 수 없었다. 나는 동서를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동서는 당당하게 논리를 펴는 내 말에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받아들였다. 다른 방에 계시던 시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유난히 시어머니의 어깨가 좁아져 있는 것 같았다. 마음 한쪽으로 전기가 찌르르 흘렀지만 애써 누르며 돌아섰다. 

    

  그해 여름방학이 되어 남편이 사는 원주로 내려갔다. 어느 점심 때쯤 갑자기 시어머니가 찾아왔다. 나는 눈치껏 점심상을 차려 시어머니께 권했다. 같이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는데 시어머니가 그놈의 인삼, 누가 꼭 먹어서 맛이냐? 고 운을 떼셨다. 입이 무거운 분이 맺힌 게 많은 것 같아 잠자코 들어드렸다. 큰 형님 내외와 장성한 조카들이 함께 금산에 가서 인삼을 사 왔는데, 당신은 한 뿌리도 안 주고 자기네끼리 먹더란 얘기였다. 까짓 인삼이 얼마나 간다고 그렇게 치사하게 구냐고, 나는 열심히 침 튀기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함께 공분해주어선지 어머니 얼굴이 좀 펴진 것 같았다.     


  나와 큰 동서는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넘었다. 나는 막연히 시어머니와 큰 동서는 나보다 세대 차가 적어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나한테 밀어버렸었기에 동서가 못마땅했다. 그런데 막상 인삼 얘길 듣고 보니 세대 차만으로 시모와 며느리 간의 틈새를 좁힐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싶었다. 어쨌든 그 사건으로 나는 큰 동서가 시어머니를 홀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문에, 더욱 큰 동서와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동서의 죽음을 겪고 보니 늙어 죽어가는 과정이 누구나 별반 다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녀들이 부모를 수발할 수 없어 요양병원에다 맡기면 병원에서는 한쪽에 내쳐진 늙은 호박마냥 있는 듯 없는 듯 취급을 받으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 같다. 그나마 호스피스 병동이 백배 나을 듯하다. 거기에서는 죽어갈 때까지 환자의 희망과 꿈, 바램을 소중히 여겨주며 적어도 사람으로서 그의 의사를 존중해주니까 말이다.  그저 내 발로 걸어 다니고 내 손으로 해 먹으며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자는 듯이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동서의 시신을 보던 순간은, 삶도 욕망도 맺혔던 갈등까지 모든 게 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졌던 냉랭한 마음도 다 풀렸다. 나는 동서를 보며 속으로 미안하다고 외쳤다. 죽어있는 사람을 향해서 마음을 푸는 것은, 참으로 쉬웠다. 까뮈의 말처럼 죽은 사람이기에 더 관대한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더이상 감정도 돈도 그 무엇도 계산할 게 없으니까. 그때 나는 ‘이제 손을 펴서 내려놓아야 할 시간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동안 세월이 좀 더 흘렀고 나는 더 늙어가는데 왜 마음이 바뀌어 자꾸 오그라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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