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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Apr 01. 2021

담배 두 보루

  동문 로타리를 지나 바닷가에 접어들자 바람은 두 배로 세차게 불어왔다. 시내를 걸어올 때만 하더라도 춥긴 했지만 그리 싸늘하지는 않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숨도 막히고 무엇보다 귀가 얼얼했다. 나는 얼른 목도리를 벗어 머리부터 다시 썼다. 머플러 사이로 어머니의 귀가 다 드러났다. 뽀글뽀글한 아줌마 파마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머플러가 바람에 흩날려선지, 걸어가면서도 손을 귀로 자꾸 가져가셨다. 


  “어무니, 귀 실령 안되쿠나 그냥 돌아가게 마씸.” (귀 시려워 안되겠어요. 돌아가요)


  그러나 어머니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선 계속 앞장을 서셨다. 우리는 함께 제주항 끝쪽에 자리 잡은 한전지사에 외상값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외상 장부에서 한동안 밀린 구식(가명) 씨의 외상값을 보고 호통을 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어머니가 절대로 꺽지 못 할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외상값을 받으러 가는 내 처지가 궁색하기도 해서 나는 돌아가자고 투정을 부렸다. 


  집 가까이에 있는 한전 숙소를 찾아갔다가 허탕을 쳐서 3km가 넘는 한전지사까지 걸어야 하는 그날의 행군은 참 고역이었다. 다행히도 구식 씨는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사람이 찾아왔다니까 업무실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는 미소 띤 얼굴로 잘 있냐는 둥, 요즘엔 왜 안 오느냐, 안 본 사이에 더 건강해지고 보기 좋아진 것 같다며 칭찬을 하였다. 급기야 사위 삼고 싶으니, 시간 나서 오면 넷째 딸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갖은 말로 달랬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야 외상값이 밀렸는데 좀 갚아달라는 얘기를 했다. 어머니가 잘 구워삶아서인지, 아니면 회사까지 외상값 받으러 온 것이 쑥스러워서인지 다행히 3만원이 넘는 외상값은 그날로 해결이 되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본에서 돈을 벌면서 고생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론 돈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자유롭게 지내던 우리들의 생활은 아버지의 등장으로 갑갑하게 바뀌어 갔다. 당신이 술을 마실 때는 돼지껍질을 안주로 삼았고 라면도 퉁퉁 불려서 드시곤 하였다. 전기세나 수도세를 아끼라고 점검하며 따졌고, 가게 아궁이 보일러의 연탄불을 꺼트리면 호통을 치셨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그런 아버지가 고달프고 싫었다. 게다가 엄마랑 나랑 한전지사에 외상값을 받으러 갔던 일로 어머니의 귀에 가려움증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그 때문에 아버지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    


  1985년 그해 겨울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마침 아버지와 나는 가게를 보고 있었는데 우리 집 앞 저택에 사는 권변호사가 가게로 들어왔다. 그는 야당 국회의원 후보였는데 대뜸 ‘담배 1갑만 주세요’라고 말했다. 평소에 운전기사나 가정부 아주머니를 통해서 해결하는 일을 직접 나선 것이다. 아버지는 갑자기 솔담배 2보루를 꺼내 들었다.

 

 “그냥 가져가십시오. 제가 응원하고자 드리는 겁니다.”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스스로는 라면값도 아끼던 분이 담배 2보루를 선뜻 내밀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자원봉사가 필요했던 변호사는 아버지를 통해서 나를 자원봉사자로 고용했다. 나는 변호사네 집에 가서 부인의 편지를 보고 그대로 대필하는 일을 했다. 무보수 봉사였는데 종일 꼬박 편지를 쓰는 일은 팔이 아프고 어깨가 저리는 것이었다.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축하해주려는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싶게 그 집을 드나들었다. 그러다 그는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서울로 이사 갔다. 아버지는 여느 날과 같이 삶은 돼지껍데기에 술잔을 기울였다. 그 모습이 왠지 안쓰러워 나는 아버지의 술잔 가득 술을 채워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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