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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Apr 08. 2021

만개한 벚꽃

 어머니한테 위암이 발병한 것은 2003년 1월, 내가 00대학교로 막 파견을 받아 들떠 있던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대학원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 수련을 받던 때라, 내 맘대로 시간을 조정할 수 없었다. 국립암센터까지 차를 몰고 가려면 학교에서 병원까지 3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가 암센터에 입원했을 때도 나는 어쩌다 얼굴을 내밀뿐 자주 가기도 힘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어머니의 병간호가 문제가 되었다. 나는 간병인을 쓰자고 주장했으나, 고 3 생인 딸이 있는 큰 언니가 계속 간호를 맡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지 두 달쯤 되었을까, 연구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셋째 언니의 전화가 느닷없이 걸려왔다. 어렵사리 잡은 어머니의 위암 수술이 취소되었다는 거였다. 그날 어머니의 퇴원이라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셋째 언니와 함께 차를 몰고 일산 암센터로 향했다. 담당의와의 면담시간에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셋째 언니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해주셨는데......”

  “최선은 무슨 최선을 다해요?” 


  의사가 쏘아붙이더니 몇 마디 말을 하고는 나가버렸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이야? 싶게 셋째 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셋째 언니는 의사가 수술을 취소한 게 아니었구나 하며 낭패한 표정으로 큰 언니를 찾았다. 그제야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퇴원 수속을 끝냈다. 어머니와 큰언니, 셋째 언니를 태우고 병원에서 2시간 남짓 걸리는 과천 셋째 언니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마음만 답답한 채 차를 몰고 가다가 점심을 들고 가자는 얘기에 백운 호수로 차를 돌렸다. 백운호수에는 라이브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익히 알만한 가수들 이름이 크게 붙어 있었다. 셋째 언니는 그중에서 진시몬이란 이름을 발견했고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레스토랑에 차를 세우고 내가 돌아다 본 순간, 어머니는 담담하게 기도하고 계셨다. 우리는 점심으로 샐러드와 마늘 빵 그리고 스프와 스테이크를 시켰다. 어머니는 겨우 스프만 몇 숟갈 드시고는 조용히 앉아 호수로 눈길을 돌리셨다. 마침 그날은 진시몬이 노래를 부르는 날이었는데, 다른 사람으로 바뀔 무렵 언니들과 함께 그가 어머니께로 왔다. 그는 우리 고향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이고 영 잘 생겼구나게. 아버지 꼭 닮았져. 게난 여기서 노래 불럼시냐?” 

  (아유, 잘생겼구나, 아빠 닮았네. 그러니까 여기서 노래 부르냐?) 


  어머니는 다정한 그의 인사에 화답하듯 반갑게 말씀하실 뿐, 아프신 티는 그 어디에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날 그 점심이 어머니의 마지막 외식이었다.


  정신없이 대학원 생활을 하던 4월의 어느 날, 커다란 벚나무가 있는 교정을 걸어가고 있었다. 늙은 벚나무 등걸에 틈새가 보였다. 가느다란 틈새가 굵어져 혹을 이루고 어느 틈은 더 파여서 그 안에서 곰팡이가 번지고 있었다. 나무는 소리 없이 거친 숨을 토해내는 것 같았다. 그 나무를 보니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 위 안에 있는 혹이 더 크게 자라날 거란 생각에 초조해졌다. 전화를 걸었다. 먼 곳에 계시니 찾아뵐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운 밤이었다.

  그러다 5월 초순이 되자 대학원생들이 채집 여행을 떠날 때가 되어 나는 고향으로 갔다. 고향 집 목욕탕에서 어머니를 목욕시켜 드리고 나서 눈을 감고 기도하듯 안마를 할 때였다. 어머니의 등허리 가운데 부근에서 갑자기 단단한 덩어리가 손끝에 닿을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울음에도 어머니는 별말 없이 그냥 안마를 받으셨다. 나는 분위기를 돌리려고 어머니께 음식 하나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소고기 고추장이 막 맛좋나.”

  소고기랑 양파, 마늘, 참기름과 매실청을 넣고 고추장을 볶으면 된다면서 음식을 잘못하는 나를 위해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소고기는 좀질게 썰어사(잘게 썰어야) 씹는 맛이 더 좋아.”


  시간이 날 때마다 어머니는 침상에 누우신 채로 조용히 기도하셨다. 한쪽으로 기도하다가 힘드시면 다시 돌아누우면서도 묵주를 잡은 어머니의 기도는 들릴 듯 말 듯 계속되었다.


  “천주의 성모마리아여 이제 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끊임없이 기도를 해서 그런지 어머니의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셨다. 만개한 벚꽃이 떨어지듯이 삶이 사위어가는 어머니, 그게 내가 그날 어머니 모습에서 느낀 거였다.


  그해 8월에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셨다. 언제나처럼 당신이 뭘 하고 싶다는 주장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서. 어머니가 수술도 못 해보고 돌아가셨다는 회한이 내 가슴에 박혔다. 


  장례식이 끝나고 밤늦도록 자매끼리만 모여앉아 얘기할 때였다. 나는 어머니의 수술 취소에 대해서 터놓고 물었다. 큰 언니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큰 언니는 남동생과 의논했다면서 화를 냈다. 위뿐만 아니라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취소를 했다고 한다. 나는 왜 나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는지, 게다가 어머니의 의사는 고려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큰 언니에게 미친 듯이 따졌다. 큰 언니와의 보이지 않던 금이 큰 틈새로 벌어졌다. 나는 큰 언니를 용서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서야 ‘나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니를 돌보지 못했으면서도, 모든 것을 큰 언니 탓으로 돌렸던 것이다. 이렇듯 가슴에 박힌 얼음이 녹아내리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머리로 안다고 해서 가슴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작년 8월에 형제자매끼리 모여 제사 준비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마지막 가실 때까지 침상에서 이리저리 돌아누우시면서도 늘 묵주를 놓지 않으셨던 어머니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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