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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Nov 23. 2023

볼리비아 비자 신청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11월 6일 월요일 새벽 3시, 아파트 복도에 서서 바라다본 밖은 어둠 속에서 빗소리만 요란했다. 시장바구니를 든 채 남편이 망설였다. 비자서류와 방석이 들어있는 검정 바구니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나도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다시 또 새벽 2시 반에 깨어야 한다면 아, 싫다!’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여보, 가자”

  내가 먼저 엘리베이터로 다가가 버튼을 눌렀다. 하늘에서 비가 퍼 붇고 있었다. 지상 주차장이라 바닥에도 빗물이 철퍼덕거렸다. 남편은 앞뒤로 서너 번 왔다 갔다 하며 조심히 차를 뺐다. 차는 빗속을 뚫고 서울로 향했다.


  사실 남미여행은 생각지도 못하다가 값싸게 갈 수 있다던 친구 말에 혹했던 거였다. 갑자기 그 여행이 취소되어 서운해서 남편에게 얘길 꺼냈다가 나중엔 돈이 있더라도 다리 떨리면 못 간다는 말에 큰맘을 먹었다.

  우리는 남미 5개국을 30일 동안 여행하는 여행사의 새미페키지 프로그램을 예약했다.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거치면서 맞추픽추나 우유니사막, 이과수 폭포 등을 관광하는데, 그중에 우유니사막을 가려면 볼리비아 비자가 필요했다.   

   

  “하필이면 왜 오늘 비가 많이 오는 거야?”

  “그러게. 그래도 인지가 또 떨어지기 전에 얼른 비자를 발급받아야지.”

  나 혼자 투덜거리는 말에 남편이 응수하며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다.

    

  한강 대교를 건너기 전부터 고가다리와 터널이 이어지는 부분에선 물이 터널로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 전 충청도에서 터널 안에 물이 불어나 죽었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콸콸 넘치는 물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다행히 터널을 지났다.


  볼리비아 비자를 신청하려면 일단 여권 사진을 찍어야 했다. 비행기 인, 아웃 티켓도 있어야 하고 호텔도 미리 정해져야 하며 은행 잔고 증명서도 챙겨야 했다. 여권 사진 2만원, 잔고 증명서에 2천원이 들었다. 비자 신청 시에도 1인당 30불을 내야 한다. 그런데 여행사를 통해서 발급받으려면 100불을 내야 한다. 우리는 140불을 아끼려고 개인적으로 비자를 신청하려는 거였다.

대사관에 있는 볼리비아 비자 접수 안내판(황열병접종은 없어도 됨)

  그전 금요일 아침 8시 30분, 버스를 타고 볼리비아 대사관이 있는 부영빌딩에 도착했다. 어느 쪽 출구를 이용할지 헤매다가 회사원의 도움으로 한층 아래쪽에 있는 회전문을 통해 안내데스크로 갔다.      


  “이미 5시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번호표가 빨리 마감 됬구요, 7시에 왔던 사람들도 못하고 돌아들 갔어요”     

  당일 번호표가 마감되었다는 안내원의 말에 ‘하’하고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9:30분부터 업무는 시작하는데 이 무슨 일이람. 잠시 주춤거리고 있자니 둔탁한 옷을 입은 부부가 걸어오면서 이곳에서 다시 기다리면 되냐고 묻는다. 그들의 손에는 그 번호표가 들려있었다.


  “우리도 그 전날 허탕을 쳐서 오늘 새벽 3:30분 전에 도착했어요. 우리 앞에 5번까지가 이미 나갔더라고요.”     

  그들은 구리에서 온 부부였다. 새벽에 어떻게 올 수 있었냐고 물으니, 차를 몰고 와서 부영 빌딩 앞 주차장에 주차했다는 것이다. 8시까지는 무료라며 차에서 자다가 아침 먹고 와서 서류를 접수하고 갈 거라고 했다.

     

  앞서가는 차량은 계속 비상등을 깜박거리며 달린다. 차창 밖이 뿌옇게 흐리다. 목숨 걸고 달리는 것 같다. ‘에고 이렇게 새벽녘에 대사관에 도착해야 할 줄 알았더라면 그냥 여행사에 수수료를 주고 맡길걸!’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염없이 와이퍼가 차창을 쓸고 닦는데, 남편이 길을 잘못 들었다며 한소리 한다. 나는 속으로 침만 꿀꺽 삼켰다. 4시가 다 되어갈 무렵 비는 좀 잦아지고 다행히 서소문동에 있는 볼리비아 대사관에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와 아래쪽 출입구 쪽으로 돌아갔는데 어, 회전문 주변에 아무도 없다.   

  

  “날씨도 춥고 비가 와서 아무도 안 온 걸까?”     

  내 얘기에도 남편은 정문 출입구로 가야 한다며 발걸음을 더한다. 돌아가서 보니, 웬걸, 벌써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섰다. 더러는 앉았고 더러는 서 있는 모습이 영락없다. 일단 맨 뒤로 가서 서니 다행히 빗물이 떨어지지 않는 처마 안이었다. 나는 줄을 서자마자, 맨 앞으로 갔다.    

 

  “이거 볼리비아 비자 발급받으러 온 줄인가요?”

  “맞습니다. 한번 세어보세요”     


  웃으며 받아주는 그 사람 말대로 하나, 두울 세어 나가다 보니 남편이 22번 나는 23번이다. 이제 내 뒤로 17명만 더 오면 오늘 줄도 끝난다. 그때 시간이 4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도 남들처럼 방석을 깔고 앉았다. 그나마 비는 거의 그치다시피 해서 편안히 앞을 바라볼 수 있었다.

대사관 앞 새벽

시내버스도 지나가고 새벽녘에 움직이는 사람들도 제법 보인다. 아직도 하늘은 회색빛으로 흐려져 있다. 우리 뒤의 부부는 1월 중순에 가는데도 벌써 비자를 발급받으러 왔다고 한다. 우리는 겨우 2주 남았을 뿐인데! 우리 앞의 부부는 대구에서 올라와서 대사관 앞 호텔에 묵었다고 한다. 나는 아무리 맛집이라도 줄 서는 대신 옆쪽으로 가는 편이고 백록담 기념사진도 줄서기보다 옆에서 찍고 마는 편인데...... 다들 대단하다. 우리 뒤로도 점점 사람들이 불어났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대사관 빌딩 속의 경비원이 문을 열어주기만을 바랐다.


  오전 5시, 드디어 ‘줄을 지어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고 사람들은 회전문으로 줄을 선 순서대로 들어갔다. 점점 줄이 줄어들면서 드디어 내 앞에 번호기가 위치했다. 23번! 하아, 드디어 오늘 비자 발급을 신청할 수 있구나. 이제 9시 반까지 기다리면 된다. 기쁨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거기 온 사람들이 다들 표를 하나씩 뽑은 것 같아서 번호기를 보니, 38번이 보였다. 그걸 보니 괜히 가슴이 후들거린다. 돌아 나오는데, 맞은 편에서 부부가 다가오더니 어디서 번호를 뽑나요? 하고 묻는다. 저기로 걸어가세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하고 나왔다. 잠시나 되었을까? 부인이 다가와 웃으며 인사했다. 덕분에 번호표를 뽑았다며 자신이 40번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새벽 5:10분에 이미 완료가 된 것이다.


  볼리비아 비자 신청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나마 표를 얻어서 다행이었다. 차에 앉아 의자를 뒤로 젖히며 잠시나마 눈을 감으려고 하니 쿡 하고 웃음이 나왔다. 남미에 가보기도 전에 평생 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하게 되다니! 우유니사막은 소금기가 있어서 우유처럼 하얗게 보이겠지? 거기에다 한 글자 남겨야겠다. ‘너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비를 뚫고 애를 썼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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