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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Mar 07. 2024

가지 않은 길

  대학을 졸업하던 1986년에, 수원에 있는 S대 대학원(생물학과 동물생리실)에 들어갔다. 나는 생리학 분야를 좋아했고 그것을 연구하는 교수가 되고 싶었다. 연구실에는 석사 1기생인 나와 남자 동기생, 석사2기, 석사 3기, 그리고 박사 과정의 선배가 있었다. 모두 남자들이라 그런지, 매우 건조하고 위압적인 분위기였다. 게다가 아침부터 밤까지 연구실에서 지내야 했다. 


  연구실 안에는 5m*8m 넓이의 항온실이 있었다. 그곳에는 층층이 짜여진 선반마다 네모난 수조들을 배열하고 모기를 길렀다. 모기 알은 크게 두 종류로, 축축한 헝겊에 알을 낳은 작은 열대모기(Aedes aegypti)와 물 위에 알을 낳는 밤모기(Culex pipiens)였다. 선배들은 그 모기로 모기가 왜 피를 빠는지, 피를 빤지 얼마 후 알이 커지는지, 모기가 토끼에게 어떤 면역반응을 일으키는지 등을 실험했으나 석사 1기생인 우리는 아직 연구 주제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는 선배들이 실험하고 나면, 시험관과 플라스크를 투명하게 갈고 닦느라 옷이 다 젖곤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씻은 실험 도구들을 황산이 녹아든 물속으로 집어넣었으며 며칠 지난 후 그것을 꺼내어 세척 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몫이었다. 황산 물은 위험해서 언제나 조심히 다루어야 했는데, 어쩌다 그 물이 튀기라도 하면 실험복에는 작은 구멍들이 뚫리곤 했다. 


  어느 날 박사 과정인 민 선배가 석사 1기생인 우리를 항온실로 불렀다.

  “너네 항온실을 어떻게 관리한 거야? 지금 이 안을 봐! 도대체 정신이 있어? 없어?”


  항온실 안에는 부화된 모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수조 안에는 둥글게 살찐 번데기가 우글거리고 있었고 막 껍데기를 깨고 나오려고 몸을 세운 모기들도 많았다. 애벌레가 커져서 번데기가 되면 번데기만을 먼저 골라내어 모기장을 씌워야 밖으로 날아가지 않고 모기장 안에 머물게 된다. 그러니까 선배는 왜 그렇게 미리 모기장을 씌우지 않았냐고 혼을 내는 것이다. 


  그찮아도 민 선배는 눈이 큰데, 퉁방울 굴리듯 굴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까 나는 무서워 도망만 치고 싶었다. 집에 오빠나 아빠가 없어서 남자가 저렇게 소리지르는 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했다.

더욱이 모기들은 선배들의 실험 재료였을 뿐,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우리더러 키우라고 강제하는 그 환경에, 찍소리 못하고 당해야 하는 억울함에 화가 쌓였다. 


  그날 우리는 망을 이용해서 날아다니는 모기를 잡아야 했고, 손이 떨리도록 번데기들을 채집했다. 그 후부터 나는 박사 선배가 큰기침이라도 하면 항온실의 모기가 또 날아다니나 해서 목을 움츠렸던 기억이 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연구실에 여자동기생이 한 명 있어서 그녀와 점심을 먹으며 숨통을 돌릴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수원역을 돌며 소간을 사러 돌아다닌 적도 있다. 소간이 장구벌레의 먹이였깄 때문이다. 장구벌레의 먹이를 만들려면 소간을 푹 삶은 다음 잘게 잘라서 1L짜리 비커에 넣는다. 거기에다 아세톤을 붇고 소간의 기름을 뺀다. 그리고 나면 그것을 말린 후 잘 갈아서 파우더를 만들어야 한다. 소간을 담은 비커가 실험대 위에 줄줄이 얹어진 날은 종일 간을 삶은 냄새에다 아세톤 냄새까지 범벅이 되어 정신이 혼미해졌다. 


  무엇을 연구함이 없이 실험 준비만 열심히 해대는 석사 1기생이라니! 대학을 졸업하면서 연구실 생활을 그렇게 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렇게 고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쓸고 닦고 치우는 내가 한없이 처량했지만, 무엇보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눈치나 보며 사는 생활이 참 힘들었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힘든 연구실 생활도 적응이 되어갈 무렵, 여름방학을 맞았다. 그러나 대학원생에겐 방학이란 없어서 언제나처럼 실험실에서 숨죽이며 살아가던 나날이었다.


  김정호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간다~ 간다아아~ ...... 나는 간다.’

  “저 새끼는 간다, 간다, 하더니 정말 뒈졌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박사 과정인 민 선배가 야멸차게 던지는 말에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민 선배는 마뜩잖은 얼굴로 나를 힐끗 째려보더니 아무 말 않고 하던 실험으로 돌아갔다. ‘아이구야, 내 발등을 내가 찢네. 그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입 바른 소릴 내질렀을꼬!’

대빵인 민선배의 진두지휘하에서 연구실의 모든 것은 이루어지고 있다. 논문은 뭘 봐야 할지, 앞으로 실험은 뭘 할 수 있을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의 조언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석사 1기생은 무보수로 노동하는 노동자인 셈인데, 그걸 참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내가 할 연구 거리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아무 생각 없이 대들다니! 이걸 어쩌나? 


  그런데 그날 저녁,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2학기에 교사 발령이 난단다. 갑자기 멍해졌다. 어느 길로 가야 하나? 대학원에 남아야 하나? 아니면 교사로 가야 하나? 그래도 내 꿈이 연구자니까 연구실에 남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한 편으론 연구실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버리고도 싶었다. 한참을 고심하다 어머니께 말했다.


  “그냥 계속 대학원 다니믄, 안 되쿠가?”

  어머니가 다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정아, 일단 발령을 받아 보라게. 기회가 또 이신 거 아니니까이...... 가보고, 정 싫으민 그때 강, 관두민 조켜!”

  어머니의 호소에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발령을 안 받으면 토해내야 할 돈도 문제였다. 4년 동안 면제해 준 수업료도 만만찮을 터였기 때문이다.


  일단 대학원에 휴학계를 냈다. 휴학계를 내던 날, 연구실에 들렀다. 책상에는 만화책과 논문들이 뒹굴고 있었다. 만화책이 있는 거 보니, 밤새 실험을 했나 보다. 후줄근하고 누리끼리한 실험복을 뒤집어쓴 선배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스럽게도 민 선배는 일찍 나가고 없었다. 나는 상황을 말하고 자리잡히면 돌아오겠노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선배들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남자 석사 동기생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배웅해주었다. 연구실을 떠나오면서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안녕! 한동안은 안녕. 그동안 슬프고 답답했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올 거야.


  결국, 나는 연구실로 돌아가지 못했다. 

  고된 노동자 같았던 대학원 생활이었지만, 가끔은 그리워진다. 그곳에서 내가 연구를 끝냈더라면 나는 무엇을 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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