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by 비바리우다

고향 집 마당이 생각났다. 뜨거웠던 여름 어느 날의 마당이. 그날 나는 대문의 지붕을 가로지르는 대들보에다 밧줄을 걸어 만든 그네에 앉아 하염없이 발을 흔들거리다가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리 없는 열기가 바람 따라 여기저기로 흩어져가고 꽃을 찾아 날아든 벌과 나방과 나비만 흔들거리며 맴돌고 있었다. 살찐 나방이 붕붕거리다 문주란 옆의 꽃대 높은 꽃을 희롱하며 오르락내리락 날개 짓을 하고 있었다.


더운 열기 속에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대문 사이를 왔다 갔다 쓸고 다녔다. 우리 집 앞 무덤에서 불어오는 바람일까? 그러면 나는 허전하고 쓸쓸하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고요하고 평안한 시간 안에 들어앉아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멀리 일본으로 밀항 가신 아버지가 언제쯤 돈을 벌고 멋진 갈색 가죽가방에 선물을 담고 돌아오실까?’

다섯 살의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이별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 대문이 마지막이었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아니면 봄이면 하얗게 폭발하는 왕벚꽃이 대문 좌우에 서서 꽃잎을 흩날리곤 하는 바람에 매번 그걸 심은 아버지가 기억으로 소환되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런 날은 마음이 허허로와져서 배가 더 일찍 고팠다. 뒤뜰로, 옆 뜰로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아보아도 이미 앵두 철도 지났고 딸기도 사라졌고, 오로지 가지에 달려 익어가는 복숭아를 보면서 따먹을까 말까 고심했다. 탐스럽게 달린 것은 나 말고 다른 식구들도 늘 새겨보던 것이었기에 나는 복숭아나무를 돌며 아무도 눈도장을 찍지 않았음직한 곳에 숨어있을 복숭아를 찾곤 하였으나 번번이 허탕 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뒤뜰로 가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감나무에서 초록색 감을 따서 한입 베어 씹으면 왜 그리 떫은지!

“아고 초로와라!(떪어라)”


고개를 흔드는 내가 보인다. 두 번 씹고 나머진 버려야 했다. 입을 헹구려 찬물 한 바가지 뜨다가 정지(옛날 부엌) 찬장에 있는 양념통을 뒤진다. 늘 풍부한 간장과 된장은 먹을 게 못 된다. 아지노모도(미원)는 너무 느끼해서 먹을 수가 없다. 어머니가 고왔던 엿을 담아 두던 엿 단지는 으레 비어있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저 안에는 돼지고기 갈색 엿이 한가득 들어있을 텐데.....


아버지가 일본에서 고생하시기에 우리도 같이 고생해야 한다. 엿은커녕 맛있는 반찬도 먹어본 지 오래다. 어릴 때 이별해서 아버지 기억이라곤 아버지 밥상에서 옥돔 살이 든 국을 한 숟갈 맛있게 얻어먹었던 기억과 밤 중에 아버지가 구워서 입에 넣어줬던 돼지갈비 맛뿐이다. 비몽사몽간에도 얼마나 기막히던지!


그날 모습도 떠오른다. 넷째 언니와 나는 발가벗고 자고 있었다. 옷이 별로 없을 때인지라 잠옷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는 늘 발가벗고 잤다. 자는 밤중에 아버지가 깨웠고 우릴 정지(부엌)로 데리고 가서는 입에 그을음이 붙어있는 고기를 넣어주셨다. 빨간 불기가 도는 숯불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양념이 된 고기였다. 아버지가 직접 양념하신!


한쪽 끝에 숨박꼭질하듯 숨어있는 설탕 봉지가 보인다. 설탕을 집어 입에 넣는다. 침 묻은 손가락을 다시 봉지로 드민다. 달달한 그 맛!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물바가지를 입에 갖다 대고 물을 마신다. 다시 마당으로 돌아나 온다. 어디선가 은은히 풍기는 꽃향기를 따라가다가 붕붕 나방이를 놀려주려고 보리낭(보리짚)을 들고 다가간다. 하, 이놈도 어찌나 빠른지, 내가 지 엉덩이를 누르기도 전에 멀리 날아가 버린다.


다시 돌아와 그네에 앉는다. 아직은 한낮, 밭에 가신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가 아니다. 만화책을 볼까? 아니면 방학 숙제를 할까? 만화책은 이미 다 끝냈고 숙제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올레 쪽으로 누가 오질 않나? 내다본다. 아무도 없다. 다시 그네를 탄다. 마당은 조용히 몸을 벌려 나를 안아주고 나는 시계바늘을 채근하듯이 다시 발을 힘차게 앞으로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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