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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Aug 27. 2021

모니카와 보혈 묵주

  모니카는 내가 다니던 성당의 성서 모임 지도자였다. 성서 백주간이란 이름의 이 모임은 2012년 초에서부터 3년의 넘는 세월을 함께 했는데 나이도 직업도 다양했다. 우리는 매주 화요일에 성당에 모여 기도를 하고 성서를 읽고 함께 토론했다. 


  그녀는 먼저 공부했던 경험자답게 우리를 안내하려고 애썼다. 특히 빠스카 예식을 함께 했던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빠스카는 '거르고 지나간다'는 뜻으로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천사가 이집트의 맏 배를 친다. 그때 어린 양을 희생하여 재앙이 지나가도록 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예수님의 희생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고자 유대인의 빠스카 만찬을 상징적으로 행하여 보고자 했다. 

  우리는 촛불을 켜 놓고 예식을 행한 후에 푸른 채소, 포도주, 쓴 나물, 쨈, 빵, 고기 등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가끔 성서 모임이 끝나고 뒤풀이도 하면서 회원들끼리 조금씩 더 친하게 되었다. 


  성서 모임이 끝나고 나면 나와 모니카는 성서 반장의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럴 때면 모니카는 자기 주변의 이야기를 잘 꺼내어 분위기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어떤 얘기도 주저 없이 진행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며 나는 그녀가 매우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2015년, 우리는 성서 백주간을 졸업하였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날 것이었는데 형제님(남자 회원)이 카톡 방을 개설해서 아침마다 성경 한 구절을 우리에게 실어 보내기 시작했다. 

  일테면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시편 95] 라고 소식을 전하면 우리는 반갑다는 신호로 [아멘]이라고 응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소식을 알리게 되자 가끔 개인적인 소식도 카톡을 통해 주고받았고 어쩌다 함께 회식도 하였다.


  그러다 내가 모니카가 살던 B역 근처로 이사 가던 2017년 가을, 나는 그녀에게 만나자고 카톡을 보냈다. 우리는 L백화점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는데 백화점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나는 깜짝 놀랐다. 통통하였던 그녀가 1년 반 만에 홀쭉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무슨 일 있어요? 엄청 날씬해졌네요.”    


  그렇게 말하는 내게 그녀가 한 말은 장이 안 좋아졌는지 소화를 잘못시킨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얼굴빛이 푸석해 보였다. 그녀와 함께 6층 식당가로 갔다. 우리는 한식당에 들어가 고등어 정식을 시켰다. 식사는 그럭저럭 즐거웠다. 나는 유튜브를 통해 들었던 경제에 관한 얘기를 주로 했다. 아파트가 너무 비싸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폭락할 거라는 주장도 폈다. 그녀도 아파트를 팔고 오피스텔의 작은 평수로 집을 갈아탔다는 얘기를 하며 맞장구쳐주었다. 차를 마시느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으나 그날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 어느 날 모니카가 카톡 방에 문자를 날렸다. 자신의 다니는 성당에서 해미 성지로 순례를 가는데, 버스에 자리가 남으니 가고 싶은 사람은 함께 하자는 거였다. 나는 그녀와 함께 가기로 했다. 가까스로 시간에 맞게 00성당에 도착했다. 20명 정도 되는 전례 봉사 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신부님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는 떠났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 다 함께 묵주기도를 했다. 묵주기도가 끝나자 회장이 김밥과 간식과 물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 간식도 먹고 김밥도 먹었다. 그러다 그녀가 멀미하는지,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누리끼리해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가 어딘가 심히 아픈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속이 안 좋고 그 때문에 피부까지 망가졌다는 얘길 들었었기에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해미 성지에 도착했는데 비가 쏟아져 내렸다. 미사를 본 후 기념관에 들러 무명 순교자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돌아보았다. 돌에 패대기쳐져 죽은 사람, 연못에 빠뜨려져 죽은 사람 등 죽어간 무명 순교자가 많았다. 그들이 관원에게 굴비 두름 엮듯이 엮여 붙들려 갈 때, 예수 마리아를 하도 끊임없이 불렀다 해서 ‘여숫골’이라는 골짜기도 있다고 한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걸어가 보았을 골짜기를 멀리 바라다보다가 모니카와 나는 성당에 앉아 묵상을 했다. 그러고 나서 함께 성물 판매소에 갔는데 거기에는 다른 곳에선 잘 볼 수 없는 굵은 알의 묵주가 보였다.     


  “여기 해미 성지에 있는 나무 열매로 만든 보혈 묵주래요. 잘 때 굴리면 좋아요.”


  그녀의 얘기에, 마음이 끌려 묵주를 샀다. 그녀도 나와 함께 묵주를 샀다. 좋은 상품을 고르는 사람들처럼 각자 예쁜 묵주를 고르느라 시간이 흘렀다.    


  마침 비가 그쳤고 우리는 해미 읍성으로 구경 갔다. 읍성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데 그녀가 사진 한 장 찍어달라고 하였다. 날렵해진 그녀의 몸 때문에, 헐거워져 남아도는 파란색 체크 무늬 코트가 눈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몸매가 부러웠다. 예전엔 나만큼이나 살이 쪘던 그녀가 날씬하게 카메라에 잡히는 걸 보니 내심 질투심도 생겼다.

  모두 읍성에 있는 장터로 갔다. 회장이 부침개와 도토리묵과 막걸리를 시켰다. 몇 명의 여성은 막걸리를 마시지 않았다. 모니카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 누리끼리해진 그녀의 낯빛 때문인지 그녀가 우울해 보였다.


  그리고 몇 개월이 흘렀을까? 오랜만에 가까이 있는 회원들끼리 모여 밥을 먹기로 하였다. 모니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의 집 가까운 곳인데도 나오지 않고, 나오라는 카톡에도 반응이 없는 그녀를 보자 설핏 서운한 느낌도 들었다.    


  2019년 어느 날 카톡에 성서 반장이 메시지를 남겼다. 모니카 씨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며칠째 카톡에 그녀의 <아멘> 문자가 없자, 성서 반장이 전화해봤다고 한다. 그녀의 아들에게 직접 들었다 했다. 머리가 멍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프면 으레히 부탁하는 기도조차 그녀는 우리에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적어도 죽기 열흘 전까지 그녀는 그저 <아멘>만을 날렸다는 거다. 


  종일 해미 성지를 함께 돌면서도 그녀는 내게 말이 없었고 아둔한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녀의 얘길 곧이곧대로 믿었었다. 뭔가 허망하고 미안한 것이 가슴을 후비고 지나갔다. 사진을 찍을 때 나를 쳐다보던 그녀의 마지막 눈망울이 떠올라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2019년 5월 흙먼지가 날리던 날, 우리는 안성에 있는 그녀의 이름 세자가 쓰인 묘비명 앞에 마주 섰다. 

  성녀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해 평생 기도하면서 아들의 회개와 세례받기를 원했었고 결국 그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사상가 되었다. 나의 모니카, 그녀는 외아들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눈감을 수 있었을까? 천국에서나마 아들을 위해 기도하겠지..... 이런 저런 상념에 마음이 흔들리다 다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샀던 보혈 묵주 알을 굴리며 기도했다.     

  천주의 성모마리아여 이제 와 우리 죽을 때,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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