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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Oct 15. 2021

우리 슈퍼의 나이는 마흔 세 살

  새집을 지으며 점포가 생겼다. 내가 고1이 되던 1978년 겨울, 드디어 우리 집에도 숨통이 트일 날이 온 것이다. 온 식구가 모여 슈퍼의 이름을 짓기로 하였다. 제일 상회, 성심슈퍼, 미도 슈퍼 등 몇 가지 후보가 올랐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슈퍼 어때?”    

 

  ‘우리’라는 말이 누구에게나 편하게 다가가는 것 같아서, 모두가 찬성했다. 그러나 누가 슈퍼의 주인을 맡을지가 문제였다. 해방 전에 태어나신 어머니는 글씨를 잘 몰랐다. 계산도 느렸다.    

  

  “소학교 4학년까지만 보내줘시민, 얼마나 조아시코......”

   (초등학교 4학년까지만 보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머니는 늘 그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어머니 대신 20대의 젊은 아가씨였던 둘째 언니가 가게를 맡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동네에는 큰길 따라 드문드문 슈퍼가 있었다. 그해 1월부터 드디어 슈퍼마켓을 열었다. 우리 집 맞은 편에도 슈퍼가 있었는데, 결국 우리 집 때문에 문을 닫았다. 다섯 평 정도인 우리 슈퍼 안에 각종 식품이며 공책 같은 공산품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물건이 다양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가게가 엄청 잘 되었다. 각종 뽑기와 사탕이 가게 앞에까지 좌판으로 깔려있었는데, 그 주변엔 늘 꼬마 손님들이 붐볐다. 두부나 자반 고등어 같은 소소한 반찬거리도 팔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릇을 들고 두부를 사러 오기도 했다. 그때 아이 중에 뽑기 사탕 같은 것을 몰래 사러 오는 아이가 있었다. 길 건너에 너른 정원을 가진 변호사 집 아들이었다. 여섯 살인 수빈이는 오면 꼭 이렇게 말했다.     


  “불량식품 좀 주세요.”     


  그 말을 들으면 둘째 언니는 헤벌쭉 웃곤 하였는데, 수빈이가 원하는 물건을 고르고 나면 사탕 하나를 더 얹어주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학원에 가곤 했다. 사탕, 라면 과자, 풍선껌 등 좌판에 늘어놓은 것들이 수빈이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그렇게 아이는 엄마 몰래 매일 불량식품을 사 먹으러 가게에 왔고 나는 언니가 버는 그런 코 묻은 돈으로 학원비를 내었다.   

  

  슈퍼 중에서도 담배는 허가된 가게에서만 팔 수 있던 때였다. 그 덕에 담배 손님이 많았고 그와 더불어 맥주나 소주도 잘 팔렸다. 지금도 기억나는 손님은 두 집 건너 사는 영식이 아빠다. 개인택시 사장이라던 영식이 아빠는 아침마다 출근 도장을 찍듯이 꼭 가게로 왔다. 


  “바카스 하나 도라”    

 

  아저씨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둘째 언니가 바카스 병을 따서 건네면 아저씨는 마시고서 빈 병을 탁자 위에 턱 소리 나게 얹어 놓고 갔다. 아저씨는 1주일에 한 번씩 외상값을 갚았고, 점포에 매달린 외상 장부 수첩에선 손님들의 이름과 목록이 쓰였다, 지워 졌다를 반복하곤 했다.  당시에는 바카스 한 병을 사 먹거나 계란 몇 개를 사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어쩌다 맥주 10병을 사가는 손님이라도 만나면, 언니는 미소를 지으며 신나게 주판알을 튕기곤 하였다.     


  “이거 먹으멍 공부허라”     


  밤이 되면 둘째 언니는 졸고 있는 나를 깨우려고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가져다주곤 했다. 졸린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이불에 덕지덕지 묻힌 채 잠이 들어 버렸던 적도 많았다. 그래도 그 때문인지 성적이 꾸준히 올랐고 내 몸은 더더욱 부풀어 갔다. 과묵하고 성실했던 둘째 언니 덕분에 돈 걱정 없이 고교 생활을 마쳤고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점포 안의 내용물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마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맨 처음엔 두부나 고등어 같은 부식 재료가 사라졌다. 그다음엔 가게 밖 좌판에 얹어 놓았던 각종 불량(?) 식품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 보니 가게 밖에는 맥주 상자 두 개와 달걀 몇 판만이 제 몸을 드러냈다. 그러는 동안에 세 자매는 결혼하고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함께 둘째 언니는 가게에 남았다. 2003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슈퍼 안에는 아이스크림 통이 2개가 있었고 그럭저럭 장사도 되었다. 그러나 마흔 살을 넘긴 우리 가게만큼이나 낡은 집들이 많아지면서 그 많던 아이들은 커서 아파트가 있는 신시가지로 떠났고 지금은 아이가 별로 없는 마을이 되었다. 게다가 남아있는 동네 사람들마저도 차를 타고 E 마트같은 데서 한꺼번에 장을 보기에, 이젠 달걀도 팔지 않고 아이스크림 통조차 사라지고 없다. 


  시청이 지원한 자금으로 슈퍼의 겉이 깔끔해진 것은 몇 년 전이다. 그러나 우리 슈퍼는 거죽만 남은 노파처럼 숨만 쉬고 있는 상점이 되었다. 그래도 그때 존재했던 모든 슈퍼마켓은 아예 다 문을 닫은 데 비해, 우리 가게는 언니 덕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나 할까? 가게를 열 때, 20대였던 언니는 65세가 넘는 할머니가 되도록 가게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아이고 가게에 손님이 어성 죽어지커게” 

   (가게에 손님이 없어서 죽겠네)

  얼마 전 언니는 전화에다 대고 하소연을 했다.      


  하기야 내가 가게를 보았던 날도 하루에 손님이 서너 사람이 전부였으니까. 한 달에 많아야 백만원 어치 팔고 그러면 한 기십 만원쯤 남을 것이다. 거기에다 언니는 노령연금과 약간의 이자까지 합쳐서 한 달에 60만원 정도로 생활하는데 워낙 검약한 게 몸에 배어서인지 돈이 부족하다는 낌새는 없다. 


  예전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가겟방에 들러서 수다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던 분들이 늙으면서 하나둘 저세상으로 떠났고 남아있는 분들도 집 밖을 나설 수 없을 만큼 세월이 흐른 탓인지 가게가 썰렁하다. 뒷방 늙은이만 있는 게 아니다. 뒷방 가게도 허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언니는 아침에 눈을 뜨면 자정이 다 되도록 가게를 연다. 오가는 길가의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없이 세월을 삭히고 있는 둘째 언니, 언니와 함께 슈퍼도 늙은 호박처럼 푸근하게 변해가고 있다. 



  올해로 우리 슈퍼의 나이는 마흔세 살, 마흔다섯 살이 되면 오랫동안 슈퍼를 하는 언니를 위해 기념식을 열어주고 싶다. 슈퍼에 크게 현수막을 달고 그 나이를 써줄까? 만국기를 날리며 달고나를 만들어 오가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면 어떨까? 가게 나이만큼 장미꽃을 꽂아놓고 동백 아가씨를 들으며 조촐한 파티를 여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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