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바리우다 Oct 29. 2021

이불 쟁탈전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우리 집은 온돌이었다. 그때는 난방을 따로 할 여유가 없어서 밥을 하기 위해 불을 지피는 온기로 방구들을 데웠다. 그랬기에 겨울이 가까워지면 다른 방들은 모두 냉골이었다. 


  가을이 되면 모두 안방에 모여서 함께 잠을 잤다. 어머니, 큰언니, 둘째, 셋째, 막내 언니와 나 그리고 남동생까지 모두 7명이었다. 그렇게 한방에서 잠을 자는 데도 이불과 요는 달랑 두 채였다. 우리는 이불 위, 아래로 들어가 누워야 했다. 남동생은 엄마 옆에 나머지 자매들은 먼저 이불에 들어가는 순서대로 잠을 잤는데 늘 누군가의 발이 내 얼굴에 닿았고 몸을 돌리기 힘들어 비비적대던 기억이 남아있다.


  밥을 먹자마자 방의 온기가 식기 전에 요와 이불을 깔았다. 벽장에서 이불을 날라다 바닥에 깔고 나면 나는 빈 벽장에 들어가 웅크리고 누워서 키다리 아저씨 이야기를 생각하곤 하였다. 


  화려한 저택에서 혼자 살았던 키다리 아저씨네 집 정원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든다. 그게 귀찮아진 아저씨가 담벼락을 둘러친다. 그러자 예쁜 꽃이 가득했던 정원은 겨울처럼 황량해졌다. 외로워진 아저씨가 담을 허물고 아이들이 들락거리게 되자 다시 아름다운 정원을 되찾았다는 얘기를 생각하면서 나는 아저씨의 저택 안을 상상했다. 장작불이 타는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내가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가 추워질 때쯤이면 벽장에서 내려와 이불로 들어갔다.


  당시에 우리 집 저녁 식사는 거의 언제나 보리밥에 된장국, 김치가 전부였다. 동그란 밥상을 놓고 돌아가며 일곱 쌍의 수저를 얹는다. 밥은 큰 양푼에 떠다 가운데에 놓고 국만 따로 떴다. 모두 함께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며 양푼의 밥을 먹는데 반찬이 없다 보니 먹는 밥이 무지막지했다. 보통 한 끼에 두세 양푼을 퍼다 먹으면서 우리는 얘기하곤 했다.      


  “시에 사는 사람들은 밥을 공기에 떠먹는다는데, 그 밥 먹고 어떵 줜뎌지코이?"(어떻게 견뎌질까?)


  어느 날 우연히 TV 드라마를 보았다. 아빠에게 화가 난 엄마가 가출해버린 장면이다. 그런데 남아있는 남매의 대화가 내가 생각할 때는 가관이었다.   

   

 “누나, 반찬이 김치와 멸치볶음밖에 없어.”


 반들반들하게 윤기 도는 멸치가 먹음직스럽게 올려져 있는 밥상을 받아 안고 하는 말이라니. 맛있는 멸치 반찬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날은 저녁을 고구마로 때우는 날도 있었다. 고구마가 잔뜩 달리는 가을이면 집 근처의 밭에서 고구마를 캐어다가 쪄서 김치에 먹었다. 그런 날엔 마주하고 누우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방귀를 뀌었다. 그러다 이불이 들리면 김치 썩은 방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럴 땐 서로 이불을 들썩이면서 킬킬거렸다.


  내가 큰 언니 발밑에서 자던 날이다. 잠을 자던 한밤중에 누군가 퍽 하고 내 코를 쳤다. 잠자던 큰 언니가 자기도 모르게 이불을 잡아당기며 발길질을 한 거였다. 아파서 깨어났는데 정통으로 맞았는지 코피가 엄청나게 흘렀다. 내가 우는 소리에 어머니가 일어나셨다. 


  당시는 두루마리 화장지 같은 것이 없는 때라 어머니는 종이를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 내 콧구멍에 쑤셔 넣었다. 나는 머리를 뒤로 제치고 피가 멎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피가 목구멍으로 내려오면 다시 고개를 세우고 종이를 빼곤 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되풀이해서 한참 지난 후에야 겨우 피가 멎었다. 그렇게 고생하는 동안에도 큰 언니는 잠만 쿨쿨 잤다. 나는 무심한 언니가 정말 미웠다. 


  그 뒷날인가, 나는 햇빛이 비치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챙 빗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며 이를 잡는데 큰 언니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에게 복수할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 언니의 구두에 잡은 이를 떨어뜨렸다. 다시 머리를 헤집어 이를 잡으려는데 먼저 잡힌 놈이 구두 밖으로 기어나가려고 했다. 얼른 구두를 흔들어 담아놓으려는 순간 미닫이문을 여는 소리가 드르륵하더니 큰 언니가 나왔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마당으로 나갔고 복수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날 나는 오래도록 머리를 빗으며 이를 찾아내서 양 엄지로 힘껏 눌러댔다. 


  내가 어렸을 적 시골에는 이가 엄청나게 많았다. 얼마나 많았던지 내가 6살이 되던 1967년 무렵엔 머리카락에 붙은 서캐(이의 알)가 너무 많아서 사내아이들처럼 이발소에 가서 빡빡머리로 밀기도 했다. 심지어 단체로 아이들의 머리에 디디티를 뿌린 적도 있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2011년, 작은 아이를 ELS가 있는 초등학교에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아이의 머리카락에 서캐가 보였다. 그제야 알았다. ‘이’라는 해충이 아직도 지구상에 살아있음을. 우리는 미국 약국에서 어렵지 않게 이를 제거하는 약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젠 작은 공기에 밥을 먹는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 싶게 밥상에 고기를 올린다. 각자 침대를 하나씩 차지해서 잠을 잔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에서 이를 보지 못했다. 겨울에는 손이 얼어 터질 만큼 차가웠던 물 대신 수도꼭지만 틀어도 따뜻한 물이 쏟아져나오고 정전기를 일으키던 빨간 내복 대신 반 팔 옷만 입어도 춥지 않다.


그 어느 것 하나 예전보다 풍족하지 않은 게 없다. 자가용이라는 게 있다는 소리에 입만 벌어지던 예전에 비해 모든 것이 넘쳐난다. 


  그런데 무엇이 빠져있을까? 


  무엇이 없기에 행복했던 때를 회상해보라면 그 옛날 이불 쟁탈전이 벌어지던 그때가, 양푼 하나에 밥숟가락을 달그락거리던 그때가 그리울까? 사람의 기억이란 참 묘한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 슈퍼의 나이는 마흔 세 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