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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Jan 05. 2022

향수는 반발심이야

못났다고 주눅들지말자

  “옥민아, 이쪽으로 와.” 


  한 친구가 옥민이를 부른다. 옥민 옆에 한 자리가 비어있다. 그들은 모두 신고생,  옥민이는 신고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좋은 여학생이다.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같은 학교가 아닌 내게도 옥민은 익숙했다. 


  나는 고교 1학년 영어 강좌가 열리는 00 학원에 들어서서 자리를 찾던 중이었다.  100명 정도 남, 여학생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옥민 옆 빈자리에 가서 엉거주춤 끼어 앉으려니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도 저 교복을 입을 수 있었는데 이게 다 언니 때문이야.’ 

  내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쾌활하게 떠드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혼자 조용히 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앉은 지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그들 중 한 친구가 불쑥 대화를 깼다.     


  “잠깐, 너네 무슨 냄새 나지 않냐? 강한 향수 냄새!”     


  나머지 세 명의 신고생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무슨 소리냐? 는 듯이 멀뚱한 표정을 짓다가 향수 냄새를 맡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꺼낸 그 학생은 얼굴을 찌푸리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누가 엄마 향수까지 바르고 나왔냐?      

  내 상대편에 앉은 옥민 옆 친구가 성격 좋은 옥민이를 지목했다.  

  

  “너 옥민이지? 그렇지?” 

  “아냐. 나 안 그랬어.”

  “시침 떼지 마.”

  그 소리에 옥민이가 발끈했다. 

  “아냐! 내가 무슨 ......”

  옥민이는 화가 나서 다른 쪽으로 떠나 버렸다.    

  

  1978년, 내가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 고입은 추첨제가 아니라 선발 입시제였다. 그 당시 우리 동네에서 가장 좋은 여학교는 신고였다. 그래서 나도 그 학교에 가려고 중3 때부터 열심히 고입 시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나의 꿈을 좌절시키는 계획은 우연한 곳에서 찾아왔다. 중3 가을의 어느 날, 막내 언니가 다짜고짜로 자신이 다니던 학교로 오라고 강짜를 부렸다. 막내 언니가 무서운 나는 거절을 못 했다.


  고교 입학 후 나는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 당시 학생들은 외출할 때도 반드시 교복을 입어야 했다. 그래서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학원에 몰려들었고 그 때문에 교복은 각자 자신의 수준을 알리는 척도로 작용했다.

  학원에 갈 때마다 나는 교복 때문에 주눅이 들었다. 나도 공부를 잘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내 삶을 어떻게 주워 담아야 좋을지 몰라 우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몇 달을 고민하던 어느 날 나는 결심을 했다.  ‘그래, 지금부터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하자. 대학만큼은 보란 듯이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그러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나는 공부 환경을 바꾸기 위해 창고를 활용하기로 맘먹었다. 워낙 잠이 많아서 방에만 들어가면 누워 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부로 잘 수 없는 창고를 깨끗이 치워 공부할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창고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은 한쪽으로 치우고 창가 쪽에 책상을 가져다 놓았다. 사방을 돌아가며 벽에 묻은 지저분한 때를 벗기고 바닥을 깨끗이 쓸고 닦았다. 그러나 창고의 큼큼한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이걸 어째야 할까? 고민하면서 집안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셋째 언니의 화장품 통에서 샤워코롱을 발견하였다. 오랫동안 쓰지를 않아 먼지가 뽀얗게 묻어 있었다. 나는 향수병을 열었다. 달큼한 향내가 기분을 좋게 했다. 나는 샤워코롱을 손바닥에 듬뿍 묻혀서 창고 안의 이곳저곳에 발랐다.     


  학원에 들어가 앉을 때까지 냄새에 취해 나는 내가 향수를 발랐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옥민이가 떠나자마자 갑자기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입에서 한 마디가 튀어 나왔다.    

  

  “야 옥민이가 가고 없는데도 냄새가 나잖아.”     


  힐끗대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나는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 속만 까맣게 타들어 갔다. 마음 같았으면 ‘얘들아, 사실 사정이 있어서 내가 창고를 치우고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발랐거든.’ 하면 좋겠는데 아는 애들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나보다 잘나가는 여고생들이 아닌가. 자부심이 그득한 그들에게 열등감과 소심함으로 절어 있는 내가 변명 따위를 차마 하고 싶지 않았다.

  수업은 시작되었고 나는 엉거주춤한 채로 앞만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날 성문 기본영어의 내용은 단 한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 손바닥엔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사건부터였을까? 나는 특별한 날엔 향수에 손이 간다. 대학에 가면서부터 기분이 우울한 날엔 언니의 향수를 옷에 뿌리곤 했다. 내가 첫 월급을 받던 날 산 것도 다양한 색깔의 샤워코롱이다. 혼자 자취방에 들어앉아 색색의 병에든 향수를 방 구석구석에 뿌렸던 기억이 있다. 보통 때는 가만히 있다가도 답답하면 시원한 바다향을, 기분이 우울할 땐 달콤한 코튼캔디를 온몸에 뿌렸다. 

  세월이 가면서 점차 샤워코롱같은 가벼운 향수보다 오드 퍼퓸을 그보다 퍼퓸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향수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값비싼 제품을 즐기지도 않는다. 나는 니치향수 보다 샤넬 No5 같은 고전 향수를 더 좋아한다. 

     

  아무튼 그때부터 생긴 오기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주눅이 드는, 많은 이들이 모인 곳에 갈 때, 승부를 봐야 할 때, 긴장할 때는 무슨 의식을 행하듯 향수를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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