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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May 27. 2022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렸다

  남고 1학년 담임을 맡던 4월 말, 우리 반 건이가 결석을 했다. 부모께 전화했더니 그 전날 집에 안 들어왔다고 했다. 내 심장이 벌떡거렸다. 그 학생은 3대 독자였다. 당시엔 따르릉거리는 유선 전화 말고는 서로 연락할 수단이 없을 때였다. 학생들에게 수소문했다.     

 

  “학교 공부 하기가 싫어서 집을 나갔다고 했어요.”

  건이의 친한 친구였던 다른 반 학생이 대답이다. 근처 도시로 간 건이가 공중전화로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면서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나는 통화를 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건이가 빨리 돌아오도록 설득해달라고 학생을 달랬다. 


  그 당시는 학생이 가출하면 무슨 큰일이 생긴 것처럼 학부모 못지않게 학교가 호들갑을 떨던 때였다. 그래서 우리 반 학급 규칙 중엔 말없이 가출하면 매가 10대가 있었다. 그 규칙을 정할 때, 나는 혹시나 가출할 일이 생기더라도 담임께만은 꼭 알려달라고 했었다. 언제든지 보호해주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매가 기다린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건이가 가출한 지 3일 만에 학교로 돌아온 날 아침, 나는 교실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러나 조회 시간의 종이 울렸고 교탁에 서는 내 얼굴이 굳어졌다. 몇 마디 말을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건이 앞으로 나와라.”


  건이가 교단 앞으로 나왔다. 대걸레를 들고 섰다. 내 가슴이 쿵쿵 내리쳤다. 당시 나는 임신 5개월이었고 한참 태교를 하던 때였다. 정말 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반을 맡은 담임이 아닌가?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이 밀고 나갈 수밖에...... 


  초등학교 2학년 때다.     

  “반장 나와.”     

  깡마르고 과묵한 담임선생님이 굳은 얼굴로 짧게 말했다.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앞으로 나간 명수가 엎드려 뻗쳤다.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긴 막대기를 공중에 휘날렸다. 퍽퍽퍽 엉덩이 터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시끄럽던 교실이 갑자기 싸늘해지더니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떠들 때마다 명수가 대표로서 그렇게 맞게 되자 우리는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도 교실에 들어갈 때면 조용히 기어들어 갔다. 내게는 그녀가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할머니 같았다.  그때 매를 대던 그 선생님도 나와 같은 기분이셨을까?     


  입술을 질끈 깨물고 대걸레를 들어 올렸다. 복잡한 심경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말이 딱딱하게 새어나왔다.     

  “엎드려라. 엉덩이 맞을 거니까 단단히 교단을 붙들고 있어야 해. 손이 올라오면 부러진다.”   

  

  퍽.퍽.퍽. 다섯 대쯤 때렸을 때였다.

  “에이 씨~ ”


  나는 때리는 것을 멈추고서, 건이를 내려다보았다. 감색 교복 바지 위로 솟아오른 엉덩이가 흔들린다. 마음이 착잡해졌다.     


  초등 4학년 때다. 찬 바람이 불던 어느 날 선생님이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교단 위로 올라섰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강당을 울렸다.     

  “누구야? 누가 그런 낙서를 했어? 좋게 말할 때 나와.”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우리는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도 나가지 않자 선생님은 이어서 말하였다.      

  “좋게 말하니까 안 되겠네. 너희들, 남학생 줄부터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우리는 그날 돌아가며 빗자루 몽둥이로 다섯 대씩 맞았다. 평소에 우아하게 미소만 지었던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힘주어 때렸던지, 엉덩이가 무척 아팠다. 

  베이비 붐 세대였기에 교실이 모자라서 성당 강당에다 책걸상을 가져다 놓고 임시 교실로 이용할 때였다. 화장실이 문제였다. 성당의 변소가 강당에서 먼데다 안이 컴컴하고 깊어서 사용하기가 힘들었다. 여자애들은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조숙한(?) 녀석이 성당 변소에다 남녀 성기를 그리고 선생님 이름을 썼나 보았다. 그것을 본 성당 회장님이 얘기를 전했고 그 때문에 우리는 매를 맞은 거였다. 그때 내 차례가 올 때까지 매 터지는 소리가 얼마나 무서웠던지!     


  고개를 흔들어 다시 마음을 붙잡았다.     

  “건이 너 뭐라고 했니? ”


  묵묵부답이다. 억지로 열 대를 채웠다. 가슴에선 찬기가 휘돌았다. 건이를 들여보내고 교탁을 힘주어 잡고 한참 동안 가출의 위험성, 부모의 걱정 등을 길게 늘어놓았다. 끝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고 힘주어 말했다. 그 후에 가출하는 학생은 없었다. 건이 부모로부터 아들의 엉덩이가 터졌다는 불만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때였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교실에는 동그랗고 긴 막대기에 ‘사랑의 매(?)’라고 쓰인 회초리가 있었다. 선생님은 칠판을 가리킬 때나 졸고 있는 친구들의 머리를 톡톡 칠 때, 혹은 숙제 안 하거나 떠드는 친구를 응징할 때 사용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사랑의 매’를 강조하셨고 나는 그 말을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다. 그러다 사범대를 갔고 나도 교사가 되었으며 나도 ‘사랑의 매’를 들었다. 1990년대 말까지는 당구 큐대를 잘라서 만든 듯한 ‘지시봉’이 칠판 옆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대체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교실 모습이었다.  

   

  내가 매를 맞고서도 부당하다는 생각을 못 했었고 매를 대면서도 잘못됐다는 생각을 못 해봤다. 게다가 그때 나는 참으로 사랑했다고 믿으며 휘둘렀던 매였다. 세월에 따라 사랑의 방식이 변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지금에 와서야 이런 생각을 한다. 정말로 사랑의 매였을까? 어쩌면 내 편하자고 쉽게 가르치려 매를 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도 학대에 무감각했던 것일까? 그땐 왜 당연하게 사랑이라 여기며 나도 싫은 매를 들었어야 했을까? 사랑의 매라는 게 정말 있기는 했던 것일까?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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