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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Jul 22. 2022

어떤 인생

- 순이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

   순이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79세의 나이에. 물질하느라 늘 뛰어들었던 바다에서. 왜 죽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해경이 물에 둥둥 떠 있는 언니를 보았고 인공호흡을 하고 긴급 수송해서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 전날 언니는 오래전에 죽은 전남편의 제사를 지내는 조카 집에 왔고 오랜만에 만난 아들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했다. 당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했던 듯 평소보다 머물던 시간이 유난히 길었다고 조카며느리는 회상했다.

     

  먹고 살기 힘든 1950년대에 순이 언니는 부모를 잃었다. 그러자 그 친척이 먹여주기만 해달라고 당시 국민학교 교사였던 우리 아버지에게 순이 언니를 맡겼다. 열 살이던 순이는 그렇게 우리 집 애기업개(아기 보는 아이)가 되었다. 애기업개 노릇을 하느라 언니는 학교도 못 갔고 대신 어머니에게서 물질을 배웠다. 


  스물다섯 살이 넘게 되자, 어머니는 착한 순이 언니를 위해 중매쟁이를 붙였고 순이 언니는 맞선을 봤다. 한 사람은 남의 집 거름을 퍼서 나르고 밭을 갈아 주는 총각이었고 다른 사람은 과수원 지기였다. 똥거름을 퍼주는 총각보다 잘생긴 과수원 지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언니는 과수원 지기에게 시집을 갔다. 그때 내가 국민학교 1, 2학년 무렵이었으니까 결혼식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가 순이언니를 위해 잔치를 벌였던 것을 뿌듯해했었다.  

   

  내가 순이언니를 기억할 때면, 하얀 가제 손수건과 함께 어릴 적 콧물로 반들반들했던 내 옷소매가 눈앞에 그려진다. 그러면 누런 코를 풀럭거리며 정신없이 뛰어놀던 어린 내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어느 아침, 순이 언니가 내 가슴팍에 흰 손수건을 핀으로 꼽았다. 나는 갑자기 달아맨 그게 뭘까? 궁금해하며 손수건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언니 손에 이끌려 운동장으로 갔다. 그게 초등학교 입학식이었다. 밭일로 바쁜 어머니 대신 20대인 언니가 나를 데리고 학교로 갔던 것이다. 운동장에 서 있을 때, 어디선가 찬 바람이 불었다. 매일 정신없이 마당에서 꽃과 풀을 뜯어다 소꿉장난이나 하던 나는 갑자기 낯선 아이들 틈에 던져진 느낌을 받았다. 무서웠다. 그래서 맨 뒤에 어른들과 함께 서 있던 언니를 힐끔힐끔 돌아다 보았다. 그때 언니가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언제나처럼 슬픈 눈망울에 내 눈이 닿았다. 

     

  언니의 전남편은 의처증이 심한 남자였고 언니를 의심하고 죽도록 팼다. 그냥 패기만 한 게 아니라 칼도 들이댔다. 죽을 것 같이 위험해지자 언니는 돌도 안된 아들을 데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육지에서 물질하던 언니는 전남편이 자살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늘 부지런했던 언니는 남의 집을 빌려 그럭저럭 살았는데 아들이 초등학교 때 뇌염을 심하게 앓아서 맘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온갖 설움과 풍파가 힘들었던지 순이 언니가 드디어 폭발했다. 헛소리를 해대며 실성했다. 때마침 가까이 살던 셋째 언니가 순이 언니의 병수발을 했고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마흔 서너 살이 될 무렵, 순이 언니는 친하던 해녀의 소개로 아이가 여섯이나 딸린 홀아비와 재혼했다. 그 후 둘째 딸을 낳고 일곱 자식을 키우면서 시어머니와도 사이좋게 살았다. 언제나처럼 집안일도 하고 물질과 밭농사도 하면서, 의붓자식들이 성장하고 결혼을 해서 나갈 때까지, 착실하게 어머니 노릇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언니는 천천히 늙어갔다. 그럼에도 언니의 물질은 끝날 줄 몰랐고 우리 아버지의 제사인 2월에도 바다에 나가 미역을 따서 가져오곤 하였다. 2월의 바닷가는 찬바람이 귓전을 때리고 바닷물은 살이 에이듯이 차갑다. 그러니 보통 정성이 아닌 것이다.


  “아이고 언니, 이 추운디 무사 바당에 나갑데가?” 

       (이 추운데 왜 바다에 나갔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물었을 때, 언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따 아부지 제산디! 이 매역이 막 맛존나. 이걸로 매역국 끓이라 부져.”

    (아니다. 아버지 제사인데.. 이 미역이 맛 좋으니 이걸로 미역국 끓여라.)     


  땅이 많았던 언니의 새 남편은 시골의 유지가 되었다. 부지런한 언니 덕인지 돈도 풍족해졌다. 그래도 언니는 일을 쉬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길들여졌던 것일까? 얼마 없으면 해녀 연금을 받는다며 그때까지만 계속 물질을 하겠다고 했다 한다.   

  

  “아이고 아프민 뇌선이나 먹으멍, 경~ 버티멍 일해신디 가부난 뭐 꼬게”

   (아프면 진통제나 먹으면서 버티며 일했는데 죽으니 뭐냐, 허무하다는 뜻)     


  순이 언니의 동생 영이 언니가 장례식장에서 한탄하며 던진 말이다. 영이 언니에 따르면, 순이 언니는 나이가 들면서 어지럼증이 있었나 보다. 어쩌면 그날도 물질하다가 그 어지럼증으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지 싶다.     


  “이모, 어무니가 해녀보험으로 들었던 돈 1450만원으로 영장 치뤈 마씨.”     

  조카며느리의 말이 귀를 울렸다. 그저 소처럼 일만 했던 언니는 죽어서 땅에 들어가면서까지도 당신이 마련해 둔 돈으로 장례를 치른 것이다.      

  “제일 서운한 거는 어무니 지갑에 돈 30만원쯤 이서신디예, 그것마저 가져갑디다.”     


  순이 언니는 많은 재산을 일궈놓고도 친아들 내외에게는 하나도 물려주지 못했나 보았다. 새 형부는 병원에 있던 언니의 시신을 자신의 동네로 옮겨 장사를 치뤘는데, 손님이 그렇게 많았다 한다. 소소한 경비는 자식들이 나눠서 해결했으면서도 언니가 가지고 있던 지갑의 돈까지 챙겨가는 걸 보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인간은 돈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흥부전에서부터 현대까지 재물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깊은 걸 보면, 그것은 쉽사리 뗄레야 뗄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인가보다.     

 

  나는 조카며느리의 말을 들으며 씁쓸해졌다. 그나마 시신이 편안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 나는 우렁이 각시 같은 언니가 천국을 보고 그랬을 거라고 답해주었다.


  “어무니 묻을 때 흰나비가 날아 완 예. 흰 나비가 나영, 우리 큰 딸 무릎을 스쳐 지나간 마씨...... 요즘에도 이 주일에 한 번씩 남편이랑 공원(무덤)에 감수다.”   

   

  시어머니와 사이좋게 잘 지냈던 조카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나비로 환생했음을 믿고 싶은지, 긴 여운을 남기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 옛날 슬픈 눈망울을 띄우며 희미하게 웃었던 순이 언니가 떠올라 맘속으로 기도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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