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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Feb 09. 2021

어머니의 속곳


  “아이고 빨래도 잘 햄져(한다) 니는 나 속곳 뽈아줄 똘(늙은 어머니 모실 딸)이여이~” 

고개를 들어보니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시며 나를 보고 계셨다. 흰 무명으로 된 물질옷(해녀복)에 테왁을 매고 내 앞에 선 어머니 몸에선 싱싱한 미역 냄새가 풍겼다.     


  그날 나는 샘물이 솟아오르는 바닷가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며 뭔가를 빨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가 울지도 않고 조막손을 놀리면서 잘 노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대견하셨나 보다. 어머니는 늘 바쁘셨다. 아침에 일어나 소여물을 먹이고 밥, 빨래에 아이 키우랴, 농사일하랴 가끔은 물질(해녀일)까지 정신이 없으셨다. 그 덕에 우리는 언니가 동생을 동생이 그 밑 동생을 돌봐야 했다.     


  그러다 겨울이 되면 드디어 어머니가 집에 머무는 때가 된다. 그래서 나는 겨울이 좋았다. 겨울엔 뜨개질하거나 옷가지를 꺼내놓고 깁는 어머니 옆에 앉아서 느긋이 놀 수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빼때기(고구마 썰어 말린 것)를 찌거나 등개떡을 해서 간식을 먹기도 했다.    


  둥글게 말린 털실 뭉치가 지구본 돌 듯 돌아가고 차츰 줄어들 동안, 나는 옆에 앉아서 다른 털실을 뭉쳤다 풀었다 하며 놀았다. 어머니가 바느질거리를 꺼내어 수선하기 시작한다. 빨간 내복의 겨드랑이를 꿰매고 내복의 무릎은 다른 천을 잘라서 붙인다. 나는 조각을 얼른 가져다가 바느질 흉내를 낸다. 또 다른 즐거움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바느질감은 어머니 속곳이다. 어머니는 파자마처럼 넓고 큰 흰색의 아버지 팬티를 덧대어 기워서 다시 튼튼하게 만들었다. 이때까지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젊은 아줌마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우리는 제주시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의 일거리는 농사 대신 집 안팎 청소가 되었다. 드디어 어머니의 고생이 끝났구나 싶었다. 부지런히 위층, 계단, 아래층, 마당까지 물청소로 쓸어내리고 나면 어머니는 목욕을 하셨다. 목욕 후 빨랫줄에는 어김없이 널찍하고 하얀 어머니 속곳이 휘날렸다. 그런 어머니가 매일 변함없이 하는 것은 묵주 기도였다.    


  첫 아이 출산이 가까울 무렵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올라오셨다. 할머니가 된 어머니는 등이 조금씩 굽어가고 있었다. 나는 매일 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산책을 했다. 늘 함께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사과를 깍아 드리면 어머니가 아주 좋아하셨다. 그럴 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속곳 빨아줄 딸이었는데 산바라지로 필요한 때야 어머닐 부르게 되는구나.’ 

 순산하기 위해서 나는 열심히 옷이며 이불 빨래까지 손으로 비비고 발로 밟아 빨았다. 어머니의 빨래 중 속옷은 여전히 하얗고 큰, 아버지 팬티였다. 

  “어머니, 못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아직도 이런 걸 입으세요?”

  “난 이게 제일 살그랑헌게 편허다게! (제일 시원하고 편하다).”

  도깨비 빤스도 아닌데 어머니의 하얀 속곳은 한결같이 덧대어 기워진 채로 요술처럼 기어 나왔다. 우리 집에서도 어머니는 늘 묵주 기도를 하셨다. 덕분인지 태변을 먹고 위험할 뻔했던 첫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다.  

  

  내가 대학원으로 파견을 받았던 2003년에 어머니는 위암 판정을 받으셨다. 그 소식을 듣기 전 꿈자리가 뒤숭숭했기에 불길한 마음이 오래갔다. 암센터의 수술이 우여곡절 끝에 물 건너가고 화창한 5월 초 학과에서 채집 여행을 떠나는 3일 동안 나는 어머니 집으로 갔다.    


  침대에 누우신 어머니는 연신 묵주 알을 굴리시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목욕시켜드리려 목욕탕으로 갔다. 어머니는 서 계실 수 없으셨고 의자에 앉으신 채로 둘째 언니와 내가 어머니의 몸을 닦아 드렸다. 그런데 아프신지 자꾸 언니에게 짜증을 냈다. 역시 함께 사는 언니가 엄마 투정을 받아줄 편한 딸인가보다. 나는 말끔해지신 어머니를 위해 어깨부터 발까지 안마를 해드렸다. 끝내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는 언니더러 새 묵주를 꺼내어 내게 주라고 하셨다. 


  “어머니 나 묵주 이서. 이거 나중에 어머니가 허십써.” (묵주 있어요. 나중에 하세요) 

  그렇게 말하니 언니가 주기를 주저한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다시 얼른 넘겨주라고 역정을 내신다. 그제야 속으로 아, 이게 어머니 유언이자 마지막 선물인가보다 하였다.     


  그해 8월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우리는 어머니 유품이 될만한 것들을 하나씩 챙기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태웠다. 남은 유품인 묵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묵주 알이 떨어져 나가니 더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 셋째 언니를 만났다. 언니와 얘기하는 중에 어머니 유품 얘기가 나왔다. 언니가 일주일 동안 어머니를 돌보아드린 후 올라오기 전날, 어머니는 둘째 언니를 시켜 장롱 깊숙이 두었던 검은 비닐봉지를 가져오게 하셨다고 한다. 그 안에는 그동안 한 푼 두 푼 모아둔 70만원이 꼬깃꼬깃 접힌 채 들어있었다. 누구보다도 살가웠던 딸이건만 결혼할 때 아무것도 못 해 준 것이 맘에 걸리셨나 보다. 언니는 그것마저도 집에 두고 왔다고 쓸쓸히 말하다가 갑자기 웃음 띤 얼굴로 한 마디 던졌다.    


  “그런데 어머니가 암센터에서 나오신 후 우리 집에서 한 달 동안 지내셨잖아. 그때 어머니 속곳을 놓고 가셨어. 지금도 집에 있다! ”

  그 웃음이 내 얼굴로 퍼져왔다. 

  “그래? 어머 잘 됐다! 언니, 담에 가면 꼭 보여줘.”    


  묵주를 만져도 어머니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 어딘가 허전하다. 어머니 감촉을 느끼러 언니 네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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