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바리우다 Feb 19. 2021

있으나 마나 한 아이

  동짓달이라 추운데, 맘까지 졸여가며 어머니는 신음소리를 참느라고 이빨이 부서져라 앙다물었다. 이번에는 제발 아들을! 어머니는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딸만 총총 내리 여섯째였던 것이다.(둘 유아 사망)  

  비 오듯 땀이 흐르고 끙끙거리길 몇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아기가 태어났다. 

  “또 똘이여게~” (또 딸이란다.)    


  산파 할머니의 얘기를 듣는 순간, 어머니 온몸에선 맥이 빠지고 가슴엔 절망이 흘렀다. 아기가 울건 말건 방 구들 한쪽에 밀어 넣고선 돌아누워 꺽꺽대며 우셨다. 해산의 소식이 할아버지께 전해졌을 때, 그분은 듣자마자 한 소리를 내뱉더니, 당신 집이 부서져라 문을 꽝 닫으셨다 한다.     

  “에이, 지짐년을 ~” (에이, 계집애를!)    


  그렇게 태어난 것이 나였다. 큰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못 보던 아기가 있었다. 아기가 얼굴이 빨개지도록 울어대도, 어머니는 자리에서 돌아앉아 쳐다볼 줄 몰랐다.     

  “어무니, 아기 배고픈 거 담수다.” (어머니,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요.)

  “알암져, 그냥 내불라.” (알고 있다. 그냥 둬라)    


절망에 젖은 어머니는 마음이 돌처럼 차가워져 있었나 보았다. 아기가 하도 울어서, 대신 큰 언니가 약국에서 포도당을 사 왔다. 그리곤 포도당 물을 거즈로 짜서 아기 입에 넣어주었다. 아기는 울다가 쪽쪽 빨아먹었다. 지나온 그 모든 얘길 내가 듣게 되었을 때, 말하는 큰 언니가 속으로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차라리 내게 말하지나 말지.  


  내가 태어난 지 3년째, 어머니는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그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심지어 산모 방 군불을 직접 때셨다 한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손 붙잡고 울었다. 할아버지는 미닫이문마다 고무를 반듯하게 잘라서 붙여 놓았다. 문 닫는 소리에 잠자던 남동생이 놀랄까 덧대어 놓은 그놈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도 정갈하게 붙어 있었다. 기억에도 없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막내딸은 이쁨받는다는데, 우리 집에서 나는 있으나 마나 한 딸이었다. 어쩌다 남동생은 반지기밥(쌀반)에 달걀을 넣고 참기름과 간장을 섞은 부빈밥을 먹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도 나는 보리밥에 된장국만 먹었다. 솔솔 풍기는 참기름 냄새를 맡으면, 어머니를 쳐다보긴 했으나 억울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머니도 보리밥을 먹었으니까. 딸들은 모두 같이 보리밥을 먹었으니까. 


  우리는 모두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뿐 아니라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누구든지 먼저 남동생을 감싸도록 알게 모르게 훈련되어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존재를 인정하게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절절한 체험으로 체화된 그 생각이, 할아버지를 겪고 자란 언니들의 생각도 똑같이 그랬으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남동생은 제 목숨보다 소중한 그 무엇이었다.     


  어머니의 주특기는 애정 가득한 말투로 말을 하는 거였다.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잔잔한 미소를 띄며 부드럽게 말을 하곤 했다. 잔소리를 빼고 어머니가 거칠게 욕을 하거나 매를 든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어머니의 젖이 고팠다. 사랑이 고팠다.

  나는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서 어머니가 좋아할 행동을 했다. 웃으며 인사 잘하고 집에 누가 찾아오면 말하기 전에 알아서 방석을 내왔다. 우물물을 길어오고 기꺼이 찬물로 방청소를 했다. 뿐만아니라 땔감으로 쓸 솔방울을 따거나 무엇이든 알아서 바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어쩌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 학교에서 상을 타게 되었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기뻐하셨다. 어머니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이 되었다. 학교에서 여는 글짓기 대회, 고전 읽기, 그림 등 점점 받는 상이 많아졌다. 받을 때마다 신나면서 나는 공부도 더 열심히 했다. 덕분에 중학교 올라가선 장학금을 받았다. 드디어 어머니는 나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니가 아덜이어시민 참 좋아실껀디이..” (네가 아들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라고 가끔 푸념하듯 말하기도 했다. 늘 챙겨주다 보니 동생이 생존에 허약해진 줄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안타까웠다. 나처럼 키웠으면 자기대로 알아서 삶을 챙겼을 텐데. 나도 처음부터 뭘 알고서 잘한 게 아니지 않은가, 그저 살아보려고, 인정받으려고 바둥대던 노력이 효과를 발휘했을 뿐인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욕심 많던 큰 언니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딸들이 모여 도라산으로 놀러 가던 날, 우연히 큰 언니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내 급소를 찔렀다. 

  “너는 어렸을 때, 정말 착했었는 데이......”

욱하고 치밀어 올라 나도 모르게 내질렀다.

  “그야, 있으나 마나 한 딸이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어서 착한 척 한 거겠지!”

작가의 이전글 어머니의 속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