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분 수육과 엄마

나에게 엄마란

by 바닐라라떼


저녁 메뉴는 수육이었다. 무수분 수육을 처음 해봤다. 냄비에 양파, 대파, 사과를 썰어 깔고 된장, 맛술, 간 마늘을 섞어 만든 양념을 바른 통삼겹을 넣은 후 중불로 20분 약불로 30분을 끓여 만들었다. 월계수 잎과 통마늘, 통후추도 넣어 그런가 잡내도 없었고 담백하니 맛있었다.

저녁 먹은 걸 치우면서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엄마한테 전화 좀 해 줘."

남편은 알았다며 아이들을 피해 안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통화하는 소리를 들으며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뜨거운 물을 틀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거품을 냈다. 그 거품으로 수육을 담았던 접시, 밥그릇을 닦았다. 물소리에 남편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나는 설거지 거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엄마를 남편에게 맡겼다.


엄마는 마흔다섯에 혼자가 됐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됐다. 마흔다섯. 참 젊은 나이다. 엄마 혼자 삶을 감당하기는 버거웠을 거다. 그때 우리는 죽으란 법은 없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힘드니, 하며 안아주질 못했다. 엄마도, 나도, 동생도. 그냥 가슴에 묻고 살았다. 엄마란 존재가 어른이 된 후에도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 삶 곳곳에서 엄마가 필요한 순간을 만날 때마다 나는 엄마를 탓했다.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면 엄마는 "어떡하니"라는 말로 모든 것을 대체했다. 물질적으로 도와줄 수 없음을 강조하며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내가 원했던 것은 물질적인 게 아니었는데,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했을 뿐인데 삶에 찌든 젊은 엄마는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갔다. 나 스스로 중요한 일들을 결정했고, 결혼도 그렇게 했다. 도와주지 못했는데 잘 살아줘서 고맙다면서도 엄마는 때때로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가까이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됐다.


누군가 친정엄마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말없이 듣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내게 무거운 존재가 됐다. 내가 짊어지고 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그런 존재.

안부전화를 하면 엄마는 본인 이야기하기 바쁘다. 내 이야기는 잘 듣지 않는다. 가만히 들어주다 보면 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온다. 한계에 도달하면 나는 급히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는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다. 그런 나를 대신해 남편이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일주일에 한 번이든, 열흘에 한 번이든 전화를 걸어 묵묵히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엄마는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30분이고 1시간이고 본인의 이야기를 한다. 내가 들어주기 버거운 엄마의 이야기를 남편이 들어주고 있다. 설거지를 끝내고 한참이 지나도록 통화가 이어진다. 무슨 통화를 했는지 나는 묻지 않고, 남편도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 없다는 거다.


된장을 풀은 물에 고기를 푹 담가 끓여야만 수육이 되는 건 아니다. 물 한 방울 넣지 않아도, 야채에서 나오는 물로 수육을 삶을 수 있다. 엄마의 힘든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꼭 내가 아니어도 된다. 사위와의 긴 통화로 엄마는 한동안 힘내서 지내시겠지. 내가 못하는 일을 해주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다음엔 엄마에게 무수분 수육을 해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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