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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Oct 24. 2021

어머님과의 통화

아버님, 어머님 두분의 시간들

"나 친구들하고 정읍에 갔다가 집에 가는 길이야. 너무 좋더라."


어머님의 목소리가 밝다. 가을이 본연의 색을 드러낸 주말, 친구분들과 나들이를 다녀오신 모양이다. 오랜만에 전화를 드렸는데 밝은 어머님 목소리를 들으니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이라고 하셨다. 언뜻언뜻 친구분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아버님 저녁 차려드려야 하는데 늦어졌다며 걱정을 하시면서도 어머님은 연신 웃으셨다. 


"어머님도 이렇게 한 번씩 바람 쐬셔야지요. 그래야 충전되죠."


내 말에 어머님은 호호호, 웃으셨다. "나야 잘 돌아다니지. 아버님이 집에 혼자 집에 계셔서 그렇지." 하셨다. 친구분들과 많이 다니고 싶으신데 혼자 집에만 계시는 아버님 눈치가 보여서 자제하시는 중이라고 하셨다. 친구분들을 못 만나시다가 오랜만에 만나셔서 회포를 푸셨는데 마음 한편엔 아버님 걱정이 되시나 보다. 아버님이 식사를 알아서 챙겨 드신다면 어머님이 조금 더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내고 들어가실 수 있으실 텐데. 아버님은 아마도 어머님이 오실 때까지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계실 게 분명했다. 



내가 보아온 11년간 아버님은 언제나 소파 제일 안쪽에 앉아서 TV를 보고 계셨다. TV를 보시며 한마디씩 던지시곤 하셨는데 마땅히 대꾸를 해주는 이가 없으면 혼잣말을 하셨다. 어쩌다 나라도 눈을 맞춰드리면 길게 말씀을 이어가시곤 하셨다. 역사나 정치, 시사상식 등 아버님이 알고 계신 이야기들을 풀어놓으셨는데 딱히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했다. 하지만 눈을 피할 수도 없고 대꾸를 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반은 못 알아들으면서도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아버님이 외로워 보였다. 


친구 한 분이 없으신 아버님은 일을 쉬시는 날이면 하루 종일 TV를 벗 삼아 혼잣말을 하셨을 테다. 그러다 TV 보는 것도 못 견디게 지루해질 때면 혼자 천변을 걸으시거나 뒷산에 오르셨을거다. 어머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라고 별다를 게 없었을거다. 관심사가 다른 두 분이 온전히 같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없었고 언젠가 어머님은 TV가 한 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었다. 아버님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시다가 어머님이 한 번씩 뭐 좀 사다 달라, 하시면 마치 본인 아니면 해 낼 수 없는 것인 양 당당한 걸음걸이로 집 밖을 나서셨을거다. 따분하고 외로운 일상 속에서 어머님 심부름을 하시는 일은 아버님에게 큰 활력소였으리라. 


아버님에게 어머님은 곁에 있는 가족이자 하나뿐인 친구이다. 썩 잘 맞는 친구는 아니지만 없으면 허전하고 생각나는 존재인 것이다.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언제나 어머님이 돌아오실까 소파에 앉아 하루 종일 TV만 보고 계셨을 아버님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시렸다. 평생 한 눈 한 번을 팔지 않으신 아버님은 일과 가족만을 생각하셨다. 마음 털어놓을 친구한 분이 없는걸 보면 아버님의 인생이 얼마나 퍽퍽했을까 조금은 짐작이 간다. 


어머님은 그런 아버님의 인생이 불쌍하다 하셨다. 짠하다고 하셨다. 그런 아버님 곁에서 식사를 잘 챙겨드리고 말동무를 해 드리는 게 어머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머님에게도 쉴 곳이 필요했을거다. 그게 오늘같이 친구분들과 나들이를 가는 시간이었을거다. 얼마나 좋으셨을까. 그러면서도 또 문득문득 아버님 생각이 나서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셨을까. 어머님의 밝은 목소리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아버님에 대한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님은 내가 해 드린 밥 드시고 또 힘내서 일하러 나가시는 거야. 아버님이 지금껏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아버님이 건강하시고 일도 하시니 나도 이 정도 살 수 있는 거고.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한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아버님과 헌신적인 어머님의 모습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불편하다고 해서 바꾸거나 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분이 평생을 살아오신 모습이다.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두 분만의 시간이 녹아있는 것이다.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충전을 하셨으니 돌아가셔서 아버님을 잘 챙겨드릴 것이고, 아버님은 혼자 계신 시간 속에서 어머님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셨을거다. 


어머님과의 짧은 통화를 하면서 잠깐이나마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두 분이 지금처럼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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