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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Dec 17. 2021

기분 좋은 밤

마치 처음 같은 기분으로

길을 잃었다. 내비게이션은 아무 잘못이 없다. 뿌연 하늘 끝에 해가 매달려 있다. 옆 차선엔 빈틈이 보이질 않는다. 차선을 바꾸지 못했다. 다른 선택권이 없다. 직진한다. 그 길 끝엔 목적지가 있을 것이다. 차 안엔 캐럴이 흐르고 뒷좌석에 앉은 아이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사랑스럽다. 길을 잃은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구나.


요 며칠 글을 쓰지 않았다.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습관처럼 글감을 떠올렸지만 그것도 금세 시들해졌다. 글을 쓰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안 써도 되는 거였구나. 어쩌면 그동안 나는 힘겹게 차선을 바꾸려고 했던 건지 모른다. 아직 차선을 바꿀 능력이 되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쉬는 동안 아이들과 한 번 더 눈 맞춤을 하고, 소리 내어 책을 읽어준다. 글을 쓰지 않는 이 시간도 생각보다 좋은 거구나.


지금껏 힘을 줄 줄만 알았지 빼는 방법을 몰랐다. 내비게이션이 정해주는 길만 따라 갔다. 다른 길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길을 놓치면 어쩌나 조급해하던 내가, 알려주는 길로만 가려던 내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 무리하게 시도하는 대신 한걸음 물러났다. 잘못 들어선 길 덕분에 아이의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글을 쓰지 않는 시간 덕분에 아이들에게 내 목소리를 더 들려줄 수 있어서 좋았다. 


정해진 한 가지 길로만 가지 않아도 된다. 돌아가도 되고, 쉬어가도 된다.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꽤 오랜 시간 글을 써왔지만 마치 처음 쓰는 기분이 든다. 

참 기분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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