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만에 병원을 찾았다. 병원 가는 날짜가 다가오면 여전히 긴장된다. 내가 병원에 들어가는 모습을 누군가 보면 어쩌나.. 겁이 난다.
선생님은 추석을 지내면서 혹시나 내 상태가 안 좋아질 이벤트가 있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고 하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추석을 지내며 우려할만한 큰일은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내가 피했으니까. 엄마를 만나지 않았다. 엄마를 만나게 되면 늘 그랬듯 정말 사소한 일로도 큰 싸움이 될 게 뻔했다. 그 과정을 겪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과 남편 앞에서 언성을 높여가며 더 이상 엄마와 싸우고 싶지 않다. 내겐 그럴 힘이 없다. 그렇다고 엄마의 막무가내 고집과 막말을 조용히 들으며 견뎌낼 자신도 더는 없다. 문득 그런 상황이 온다면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나의 모든 노력들이 아무 의미 없게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레 무너질 내가 그려졌고, 그다음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두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엄마를 만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편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마음은 한결같이 불편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을 해온 엄마를 보면서 내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지옥이 되었다. 차라리 내게 더 모질게 대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불편한 마음조차, 엄마에 대한 모든 감정들이 다 떨어져 나갈 수 있었으면.. 일말의 죄책감도 갖지 않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난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모양이구나,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거구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기도 했다.
-엄마. 건강하게 잘 지내. 나도 잘 지낼게.
고민 끝에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불같이 화를 낼 엄마를 상상하면서. 내게 저주 섞인 욕을 퍼부을 엄마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뒤로 엄마에겐 아무런 답이 없었다.
남편에게도, 동생에게도, 우리 아이들에게도 모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로, 엄마 말처럼 내가 유난스러워서 이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동안 했다.
하지만 생각의 끝은 변함이 없었다. 난 살고 싶다. 난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적어도 지금은 엄마를 만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엄마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내 마음에 대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공감해 주셨다. 엄마를 만나지 않은 것도 잘 한 선택이었다고 해주셨다. 당분간은 자극을 피하는 편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이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말이 참 고마웠다. 덕분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투약과 상담을 병행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고 버겁다는 나의 고백에 선생님은 지금 이 상황을 개울에 있는 돌을 모두 골라내고 뒤집어엎는 과정에 비유하셨다. 개울을 뒤집으면 어떻게 되겠냐며 흙탕물이 되지 않겠냐며.. 힘든 게 당연한 거라고 하셨다. 힘들지 않다면 그건 좋은 상담이 아니라는 말씀도 함께.
어떤 이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구나, 그래서 내가 마음이 힘들었던 거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 투약과 상담을 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드라마틱하게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와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힘들어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사실 내 케이스를 듣고 적지 않게 놀랐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채워지지 못했던 어린 시절 나의 결핍과 엄마가 된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나 감정이 뒤섞여 혼란을 일으키기 충분하다고, 복잡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하셨다. 상담만 진행하게 되면 더 지지부진할 것이라며 그래서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힘들어도 지금처럼 투약과 상담을 병행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내 케이스가 쉽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는 말로 나를 일으켜 세워 주셨다. 내 상황을, 내 감정을 이렇게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말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지만.. 그동안의 내 삶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약을 먹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선생님은 내게 약효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물으시며 효과가 없으면 약을 바꿔봐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지난 한 달을 돌아봤을 때 아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나 화를 참지 못하는 것 등은 많이 개선된 것 같다. 그전에 10까지 화를 냈었다면 약을 먹고 난 이후로 10까지 화를 낸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화가 나는 상황은 여전히 있고, 참기 힘든 순간들도 분명 있지만 참을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 건 분명하다. 화를 내는 강도와 빈도도 약해졌다.
다만 불안하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지금도 불안하다. 차도가 없을까 봐. 이렇게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며 약을 먹어도, 심리상담을 받아도 내게 큰 변화가 없을까 봐 겁이 난다. 그래서 끝내 엄마 같은 엄마가 될까 봐.. 아빠처럼 삶을 놓아버릴까 봐.. 무섭다. 이런 내 불안에 불을 지핀 건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이렇게 하고도 좋아지지 않으면 어떡해? TV에서 우울증이라고 하면 왜.. 하루종일 누워있고 집안꼴도 엉망이고.. 살도 엄청 찌고.. 그런 거 나오잖아. 난 자기가 그렇게 되면 어쩌나 싶어."
굳이 왜 그 말을 지금 내게 하는 거냐고. 참 눈치도, 센스도 없다고,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고 구박하듯 웃으며 받아쳤지만 그날 밤 난 잠을 설쳤다. 그런 불안을 이미 스스로 느끼고 있는데 그걸 그렇게 꼭 입 밖으로 다 뱉어야 속이 시원할까. 악의 없이 나를 걱정하는 그의 선한 마음을 알면서도 남편이 미웠다.
그날 이후 예고 없이 그런 마음들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불안하다. 남편이 불안해하는 일들이 생길까 봐. 내가 정말 그럴까 봐 불안하다. 내 상태가 더 안 좋아질까 봐 두렵다. 이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손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 말을 하는 순간조차 나는 두려웠던 모양이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확 좋아지지도 않을 거라고 하셨다. 종유석이 생기듯, 천천히 스며들듯..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마음을 챙기면서, 스스로를 돌보면서 약의 도움을 받고 심리상담을 병행하면 언젠가 흙탕물이 가라앉는 시기가 분명 올 거라고 하셨다.
배우자의 긍정적인 지지와 태도가 환자의 상태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안다. 남편이 나의 상태에 대해 큰 관심이 있고 지지를 해주고 싶어 하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그 방법이 어설퍼서 되려 내게 독이 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게 문제다. 선생님은 병원에 남편과 함께 오면 남편이 나를 어떻게 서포트하면 좋을지 조언을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결국 항불안제가 한 알 더 추가됐지만 꽤 만족스러운 진료였다. 선생님 말씀대로 이 과정 또한 좋은 징조라고 여기기로.. 애써 마음을 추슬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