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살아봐요. 날이 너무 좋으니까."<선재 업고 튀어>(2024)
우리는 어느 가을 결혼을 했다.
생활의 볼륨이 한 칸 높아졌다.
빨래 바구니는 제때 비워지고, 냉장고엔 물 두 병이 늘 있었다.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그 안정이 매일 쌓였다.
그 위에서 다시 ‘시작’을 누를 용기가 생겼다.
예전엔 서류에서 멈추던 회사들이 이제는 면접으로 불렀다.
캘린더에 면접 일정이 하나, 그리고 하나 더 생겼다.
서류는 더 자주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달라진 건 화려한 스펙이 아니라, 리모컨을 다루는 법이었다.
오래된 드라마를 다시 켰다. 같은 대사가 다르게 들렸다.
“꿈을 꾸기라도 해보라”는 말이
예전엔 압박처럼 들렸는데, 이제는 “지금부터라도 다시” 하라는 허가였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도
꾸중이 아니라 가능한 최선이면 충분하다는 확인으로 들렸다.
장면은 그대로였지만, 내가 달라지자 소리도 달라졌다.
면접 대기실에서 속으로 말했다.
‘막상 해보면 할 수 있었잖아?’
맞다. 어려워도 앞으로 나아가면 할 수 있었던 게 많았다.
이루지 못해도 근처까지는 갔고, 돌아가도 결국 도착했다.
더 어려운 건 더 오래 준비해서 하면 된다. 내 반경 안에서 한 칸 더.
그날 밤, TV 대신 글쓰기 창을 켰다.
옆엔 면접 질문 노트, 식탁 위엔 반짝이는 반지 하나.
나는 웃었다. 나는 의지형 인간이 맞다.
다만 이제는 먼저 나를 의지하고,
그다음에야 옆 사람이 연대가 된다.
“그러니까 오늘은 살아봐요. 날이 너무 좋으니까.”
그 허가를 나에게도 적용했다.
10분, 첫 문장, 제출. 망설이지 않고.
1장의 거실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음소거 아래에서 숨이 얕던 시절.
이제는 내가 음소거로 소음을 줄이고,
입력전환으로 내 화면을 고르고,
볼륨 +1로 내 목소리를 키운다.
리모컨은 여전히 오래됐지만,
누르는 손은 더 정확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한 칸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