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미소

영화 : 8월의 크리스마스

by 리움

하루 이틀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 휴일이면 침대를 성처럼 지키고 있는 아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저러고 있지는 않겠지 하고 혼자서 한숨을 쉬곤 한다.
밖에서 마주치는 딸은 톡톡 털어도 먼지 안 나올 것처럼 깔끔하다. 그런데 저 몰골로 침대를 등에 지고 있는 모습이라니… 사진을 찍어 놓고 싶다.
괜히 몰카처럼 한 장 정도 가지고 있으면 내가 불리한 어떤 날 쓰윽하고 내밀며 내 뜻을 관철시킬 수도 있을, 아무도 없이 아주 혼자 몰아주고 있는 사진…
아직 아이는 누군가를 오래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나 보다.
약속이 자주 있지만 그런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걸 본 적이 없다.
아쉽다. 그렇다고 억지로 그걸 종용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사람을 못 만났으니 저러고 있겠지 하면서도 안타깝다.
아이에게는 누군가에 마음을 주는 것보다 세상에서 자신의 몫이나, 자기 자신의 어떠함이 더 시급하다. 맞다. 한참 그런 때이기도 한 나이니까. 그래도 사람에게 외로움도, 기쁨도, 소중함도, 책임감도, 믿음도, 배신도, 증오도, 사랑도, 이 모든 걸 겪어 볼 수 있게 하는 건 또 사람이지 않나 싶다.

나는 첫사랑을 잘 모른다.
그게 어떤 건지, 내게 첫사랑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자칫 소멸적일 수 있을 것 같아 조금은 두려우며 동시에 돌이키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린 날의 치기일 수도 있는 그런 거이므로,
그래서 내가 한 게 첫사랑이었는지, 그냥 그때 잠시 가진 감정의 소용돌이였는지 그걸 모르겠어서 나의 첫사랑의 존재는 공석이다. 나는 사랑을 잘 모른다.

현재 내 소우주인 딸아이의 아빠, 한때 내 우주였던 남편은 반소개팅쯤으로 만난 사이다.
지인의 결혼식장 피로연에서 눈길이 부딪치기는 했으나 내 소개팅의 주인공이 그인 줄 모른 채 결혼식 당사자인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1년여 연애 후 결혼했다.
나에게 남편은 처음 사귄 남자는 아니었고 남편에게 나는 그의 말로는 처음 사랑이었다.
35살에 처음 사랑이라니, 그의 심중을 아직도 모르겠으니 신뢰감 가는 그의 언행에 기대 본다면 그런 사랑은 처음이 맞을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는…
나는 사랑의 근간에 신뢰와 존경이 없으면 그건 가벼운 감정나부랭이와 같으며, 들끓는 욕망의 미화일 뿐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사랑을 모르던 때 내가 하는 게 사랑이 맞을 수도 있겠다 할 때의 내가 그에게 가진 마음이 믿음과 존경이었고 나는 거기에 멈춰 서 있으므로 사랑을 모르는 내게 남녀 간의 사랑에 그것이 없다면 그건 그냥 그 시기의 감정나부랭이일 뿐일 수 있다는 처음 경험 때문일지 모르겠다.
물론 이 사랑이란 앞으로 내게 남아있는 시간 동안 또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재의 내게 믿음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륜을 의심하거나 딴 주머니를 차는 걸 경계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부부 혹은 연인의 이야기에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주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건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사랑은 모두 다른 모양이다.
어쩌면 내 믿음은 부서졌을지 모르고, 그 부서진 사랑의 파편을 붙들고 몇 년을 지내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아직도 그를 믿고 있는 나는 그를 사랑했다. 지금 내 곁에 없는 그이지만…

<영화 : 8월의 크리스마스>

한석규,
심은하!
한때 많은 청춘 남녀들의 이상형이며 사랑의 대상으로 대체되었던 그 이름들.
이 둘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멜로영화의 장인이라고 불린 허진호 감독이 1998년에 내놓은 작품임에도 03년생 내 아이가 이 영화를 알고 있는 걸 보면 멜로영화의 명작인 게 맞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내가 인상 깊게 본 장면은 피식거리는, 혹은 그냥 새어 나오는 상대를 향한 얼굴 속 미소였다.
초원사진관에 일 때문이지만 스스럼없이 들어와 자기 이야기를 하는 다림(심은하)의 태도에 피식 미소가 새어 나오는 정원(한석규)의 얼굴과,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자신을 그냥 지나쳐 가는 줄 알았던 정원의 스쿠터 소리가 들릴 때 다림의 새어 나오는 그 미소 어디쯤에서 사랑은 시작되었던 게 아닐까?!
시한부 같은 삶을 살고 있으나 담담하게 매일을 대하는 정원의 일상이 너무 평면적이라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게 장치하는 것은 아닌지, 초원사진관과 가족, 친구들과 함께하는 정원의 소소한 일상 장면들은 처연하기보다 담담해 더욱 슬펐다.
정원이 자신의 죽음 이후를 대비해 아버지께 비디오 리모컨 사용 방법을 알려주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늙은 아버지께 화를 내고 돌아서 자신의 방 이불속에서 오열하는 장면에서 사실은 더 크게 아팠던 건 정원의 오열보다 방문 밖 아버지의 서성거림이었다.
인간의 한계 앞에 어찌할 줄 모르고 서성이는 그 아버지의 마음, 그 가늠하기 어려운 사랑.

8월, 더위가 한창을 치고 이제 곧 사그라들 걸 알지만, 그래도 아직은 더운, 사람의 마음 같은 8월 정원과 다림은 흔히 요새들 말하는 썸?이라는 걸 탄다.

다림은 정원의 다정함을 알고 그를 믿은 것 같다. 그러니 잘 모르는 남자의 사진관에 들어와 스스럼없이 다리를 뻗고 눈을 감고 쉼을 쉬고, 정원은 그런 다림의 모습에 미소가 번지며 다림에게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일어선다. 더운 날 하나뿐인 선풍기 방향을 자신이 아닌 다림을 향해 돌리면서…

이들의 사랑이 첫사랑이라고 영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정원은 이미 한 여자를 지독히 사랑해 어쩌면 그때까지 혼자일 수도 있는 설정이었으나 내게 이들의 사랑은 첫사랑 같았다. 살짝 스치는 손길에 설레고 생각만으로도 그냥 미소를 짓게 만드는 첫사랑.
결국 정원의 죽음으로 이들의 사랑이 완성되지는 못하였으나 죽기 직전 한 사람에 대한 감정으로 체념하고 살던 일상에 불쑥 살고자 하는 욕심을 갖게 했던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생각해 본다.
어떤 다짐이나 굳은 약속도 없었으며 깊은 절망이나 슬픔도 없었고, 그저 사진과 미소, 그리고 기억만이 남았지만 이 영화는 사랑 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그러니 완성된 사랑만이 꼭 사랑이 아닐 수 있으며 처음의 사랑이 성장하여 또 다른 완결된 사랑으로 성숙할 수도 있으니 함부로 어린 날의 치기를 사랑이 아니었다고 치부할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내 어린 치기와 또한 그러해야 마땅하지라고 여겨 사랑했던, 그 모든 인연들이 완결되어 하나의 사랑이 되었구나, 고마운 처음과 작고 소중했던 마음들에게 그동안 후회했다면 이제 후회하지 말아야겠다.
어린 나는 그게 사랑이었고, 나이를 먹은 나는 이게 사랑이니…

아이야, 어떤 상처가 네 사랑을 가로막지 않기를 바란다.
스쳐 지나가도 그때 우리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면 그 인연들에 인사하자!
‘고마웠어’,라고…
아직 내가 그 인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웠어요!
스치듯 지나던 그 피식 새어 나오는 미소와 가볍게 스치던 손끝의 온기가 있어 돌이켜 보는 그 시절이 삭막하지 않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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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되면 나도 아이와 함께 초원사진관을 찾아 군산으로 영화 투어를 떠나보고 싶다. 그곳은 내 추억의 장소는 아니지만 왜인지 그곳에 가면 내 첫사랑도 있을 것 같아서...

몰카로 찍는 험한 아이 사진이 아니라 눈에 사랑이 가득 담긴 아이의 한때도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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