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고집 아닌

영화 : 461개의 도시락

by 리움

남편은 생전에 “영원”이란 단어를 결벽적으로 싫어했다.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최고?, 최대? 는 “처음 그대로…”였다.
그래서일까, 나도 영원이란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유한한데 영원이라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약속 같은 것이므로…

어떤 유튜브 채널 속에서 남창희라는 배우가 ‘상황 봐서…’라는 말로 약속을 대신하는 걸 보고 '저 사람도 참 생각이 많나 보구나' 했다.
그냥 “그래, 그러자”, 약속하고 못 지키면 그만일 수도 있는 상황을 약속을 피하고 확정적 미래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던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나 또한 생각이 많아졌다.
약속이 나를, 남을, 주위를 옭아 매기 시작하면 그게 고집이 될 테고 그걸 경계하는 삶의 한 방식으로 나온 말이 “상황 봐서…”라는 유연함이었을 텐데 이 유연함이란 때로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책임을 회피하는 우유부단의 다른 이름일 수 있어서…

사실 나는 어떤 일을 두고 약속을 정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또 그 약속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런 내가 보기에 아이는 약속이 너무 가볍다.
친구와 점심 약속을 해 일찍 나가겠다던 아이가 점심때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고 있으면 아이의 약속임에도 아이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어 자는 아이를 깨우며 약속을 상기시킨다.
아이는 피곤했는지 몇 번을 깨워도 일어나지 않다 마지못해 “약속 취소했어” 가볍게 말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그러면 그만 끝! 이면 되는데 그런 아이의 방을 나오며 나는 짜증 섞인 한마디를 남긴다.
“그럼 그렇지, 너랑 무슨 약속을 하니?!”
안 해도 될 말을 왜 하고 나오는지…
그 약속이 어떤 의미인지 내겐 중요하지 않고 그 약속이 약속이 되도록 하는 내 고집이 중요해진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부터 나는 아이에게 약속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사소함을 지켰으면 했던 것은 아이에게 어려서부터 이야기했던 아주 중요한 약속을 아이기 지키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서였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아이에게

‘엄마가 없어도 학교는 꼭 가야 해!’
‘너도 아프게 하지 말고 남도 아프게 하면 안 돼!’

‘이건 꼭 지켜야 해!’라고 말해 왔던 것 같다. 그건 처음엔 약속이었지만 어느 순간 내겐 고집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아이는 질풍노도의 길에서 이 약속을 잊은 듯했고 그 가벼움이 내겐 점점 공포가 되어 엄마란 존재로서 고집스러워지던 그 변화무쌍하던 시절, 아이가 아무리 내 마음에 돌을 던져도 아이를 위해 최소한은 하자, 하던 나의 다짐, 고집 같은 약속이 생겼다.
‘미워도 밥은 주자’였다.

너에게 험한 눈길과 비수 같은 말을 해도 너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건, 내겐 그저 ‘한 끼의 밥’이었다.

<영화 : 461개의 도시락>

실화 모티브의 일본 영화로 SNS에 매일 같이 올려진 도시락 사진으로 시간을 대신한다.
영화는 주인공 코우키가 고등학교 3년 동안 매일 먹었던 도시락, 461개의 기록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에서 시작된다.

영원을 맹세했을지 모르는 연인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그 아이에게 사랑을 듬뿍 주며 시간을 보내지만 우리의 삶이란 것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아 세월 속에 고집스러운 무언가가 험한 눈길 속에 포개어졌을 것이다. 그런 눈 때문에 이혼했다는 아버지의 말을 아이에게 자세히 들려준다고 해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의 아이가 온전히 그 헤어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부모의 이혼은 이미 아이게게 커다란 구멍이며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사랑이 또 필요할 터이나 함께 사는 아버지는 처음에 그리 진지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가 신중하고 진지하다 못해 어른스러워 보였고 그런 아이와 자유분방한 아버지는 고등학교 진학에 앞서 하나의 약속을 한다.

"아버지는 매일 도시락을 쌀 테니
아들은 매일 학교에 빠지지 말고 가자"
는 불 꺼넣고 떡을 썰던 한석봉 어머니 같은 교육열?을 보이며 도시락 사진이 업로드되기 시작한다.

직업이 뮤지션이던 자유분방한 아버지가 지키기엔 너무 어려운 약속이었으므로 아이는 신나는 걸 즐기는 아버지의 새로운 재미거리 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르겠으나 신기하게도 이 자유분방한 아버지는 매일의 약속을 지켜낸다.
술을 떡이 되게 마시고 아침에 들어온 날에도, 숙취를 부여잡고 그냥도 아닌, 정성껏 도시락을 준비하는 과정 사이사이 아이는 조금씩 조금씩 자란다. 몸도 마음도
일본도 우리 못지않게 입시 압박이 심해 보였고 가정과 학교 모두에서 여러 가지 의문을 풀지 못한 아이는 결국 딱 하루 결석을 하며 일탈을 한다.
결석은 아버지와 한 약속을 어긴 것이었으나 아버지는 그 하루조차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도시락을 준비하러 먼 길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온다.
일탈 후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평소와 같이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챙겨 주며 아무렇지 않게 장난스레 '시간이 아슬아슬하니 서두르라'고만 말하고, 그런 아버지의 말에 아들도 마음을 놓고 미소 지으며 응대한다. 그렇게 위태로운 일탈을 마무리하며 일상이 이어진다.

결국 약속은 깨졌으나 깨지지 않았다.
이가 하나쯤 빠졌다고 그 빠진 이에 집중했다면 그때부터 그건 고집이 되었을 것이나 그 빈 하루가 없이는 약속이 완성되지 않을 거라는 걸 어쩌면 자유분방해 보였던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버지의 유연함과 믿음을 자신에 대한 방임과 책임회피, 어쩌면 무관심이라 잘못 판단했던 우리의 코우키들에게 매일 그의 아버지가 준비한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어쩌면 편의점에서 주먹밥과 두유를 사 먹으라고 매일 돈을 쥐어 주던 그 거친 손 또한 아무 약속이 없었음에도 견디고 애쓴 사랑이며 약속의 다른 형태였을 것이라 스스로 위안해 본다.
그런 위안으로 방학이라고 하루 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않다 밤 12시 언저리에 일어나 배가 고프다는 아이에게 휘리릭 한 그릇 볶음밥을 내주는 그 무심함 또한 너에게 약속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세상에 영원이란 없을 수 있고 또, 약속은 깨질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며, 빠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발짝 내딛는 매일이 또 있으면 그걸로 우리의 약속은 이어질 것이다.
‘너를 해치지 않고 매일을 살라’는…

그리고

'처음 그대로...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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