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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재 Apr 30. 2023

육아와 가사라는 조별 과제

프리라이더의 최후

아기가 태어난다. 사실 태어나기 전,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자리 잡을 때부터 조별 모임은 시작된다. 남자와 여자 2인 1조로 구성된 이 조의 이름은 '부모'이다. 부모라는 조별 모임은 수십 년 과정으로, 죽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아기가 태어나면 본격적으로 조별 과제가 시작된다.

여자는 출산이라는, 시작부터 혹독한 개인 과제에 시달린다. 남자는 그저 과제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면 묵묵히 옆에 있는 것이 최선이다. 폭풍 같은 과제가 휩쓸고 지나간 후에는 여자는 후유증에 시달린다.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 남자는 꿀 같은 휴식을 맛본다. 그리고 이제, 집으로 엄마와 아기가 오는 순간부터 남자와 여자의 조별 과제 분업이 시작된다.


조별 과제는 단순하지만 복잡하다. 육아와 가사.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육아는 최소 1인이 아기에게 항상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 한 명이 가사를 해야 하는데, 보통 육아를 여자가 하면 가사를 남자가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간혹 어떤 남자들은 조별 과제 중에 아르바이트가 있다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가 있곤 한다. 물론 아르바이트는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는 기다려준다.


그런데 간혹 어떤 남자들은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다녀온 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힘들었다며 육아 또는 가사라는 과제를 미룬 채 휴식과 취침을 한다. 결국 여자는 아침부터 저녁, 심지어 밤새 홀로 조별 과제를 해치운다. 여자가 조별 과제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눈앞에 아기가 있고,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고, 십수 년이 지나면서 조별 과제의 결과물을 발표할 시간이 된다. 발표 심사는 아이가 담당한다. 그런데 발표 자료 첫 페이지에 조별 모임 참가자의 이름이 이상하게 적혀 있다. 엄마의 이름은 있는데, 아빠의 이름이 없다. 발표 심사자의 입장에서 발표 자료를 만드는 데에 기여한 사람은 엄마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프리라이더인 아빠는 F학점을 받고 절규한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다고!"



많은 부모들, 이라고 하면 엄마들이 너무 억울하니 많은 아빠들이 육아와 가사에 있어서 프리라이딩을 한다. 조별 과제는 자료 조사, 발표 자료 작성, 발표, 리포트 작성 등의 과정을 거치는데 조별 과제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 어느 하나도 건너뛰면 좋은 학점을 받을 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 발표 자료 작성을 담당한 사람이 잠적해 버리면 발표하는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조장이나 책임감 강한 사람이 공백을 메워 보지만 조원들 모두가 합심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에 비하면 엉성한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한 조장은 C학점을 받고 절규한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율이도 가사도 다 혼자 도맡아 했다고!"


조별 과제는 늘 이런 식이다. 프리라이더가 한 명이라도 생기면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안 좋은 결과로 돌아온다. 심지어 2인 1조 인 조모임이니 한 명이 빠지면 나머지 한 명이 독박 육아에 독박 가사를 해야 한다. 함께 해도 벅찬 과제량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자들이 이 점을 간과한다. 대학 시절 프리라이더들을 증오했던 그들이 어느새 가정에서 프리라이딩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인 분위기, 시댁의 서포팅, 와이프의 인자함, 아이의 묵인 등을 통해 많은 아빠들은 프리라이딩을 즐긴다. 하지만 그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프리라이딩의 끝은 결국 엉성한 결과물과 '아빠의 기여도 없음'을 똑똑히 인지하고 성인이 된 자녀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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