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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재 Sep 14. 2022

아, 제가 눈이 좀 많이 나빠서요 ㅎㅎㅎ

'장밍아웃'에 대하여

비장애인으로 20년을 살다가 시각장애인으로 살게 된 지 11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나는 나의 '장밍아웃'(장애+커밍아웃)이 어렵다. 가수 박혜경의 '고백' 가사처럼 "말 해야 하는데- 네 앞에 서면- 아무 말 못 하는- 내가 미워져"버린다. 과속 방지턱처럼 말을 하려다가도 턱, 가슴에서 목울대로 올라오는 중간에 한번 말문이 막히고 나서야 입 밖으로 나오는 그 말. "제가 눈이 좀 많이 나빠서요.ㅎㅎㅎ"


이런 고민을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내가 '겉으로 티가 안 나는 장애인'이어서 그렇다. 세상에는 많고 많은 시각장애인이 있지만 겉으로 봤을 때 티가 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나는 저시력이면서 초점부 시력을 잃은 스타가르트병 환자이기 때문에 장애가 거의 티 안 나는 편이다. 이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데, 좋은 점은 가만히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장애인이라는 선입견 없이 대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서, 외적인 모습으로 '장애인'이라고 인식하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 자체를 보기보다 '장애인'이라는 자신만의 기준에 맞춰 보게 된다. 그리고 이는 많은 장애인들이 불편해하는 부분이다. 나는 내 질환의 특성상 이런 불편한 기분을 덜 느낄 수 있었고, 이는 나에 대한 평가를 '장애인 치고는 일을 잘 하네'에서 '일을 잘 하는데 알고 보니 장애가 있다더라' 정도로 순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눈에 띄지 않는 장애'는 단점도 있었다. 내가 눈에 띄게 장애인임을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공공도서관 사서다. 도서관에서 동료 직원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용자들을 상대하다보면 내 장애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설명해야 할 순간이 오곤 했다. 가장 흔한 경우는 이용자가 책의 위치를 물어볼 때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을 때에는 책의 주소인 '청구기호'를 보고 찾아야 하는데 나는 맨눈으로는 청구기호가 보이지 않으니 휴대용 독서확대기를 들고 찾을 수밖에 없다. 어른들도 그렇지만 어린이들은 호기심에 "이게 뭐예요?"하고 물어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이건 독서확대기라고 글자를 확대해서 볼 수 있게 해 주는 건데..."하고 설명해야 했다. 또는 이상하게 보는 시선을 느끼고 내가 먼저 밝힐 때도 많았다. "아, 제가 눈이 좀 많이 나빠서요.ㅎㅎㅎ"


대부분의 경우 '아~ 그렇구나'하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넘어가곤 한다. 왜냐면 내가 처음 보는 특이한 도구(휴대용 독서확대기)르 들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눈에 보이는 건 잘 믿는다. 하지만 내가 그런 '눈에 보이는' 표식을 들고 있지 않을 때에는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길을 지나가다가 다른 직원의 인사를 못 보고 지나치거나 멀리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친구의 모습을 놓쳤을 때, 나는 죄책감과 함께 불안감에 휩싸인다. '내가 무시한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내가 일부러 쌩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진작 그 사람에게 내 장애에 대해 미리 이야기할 걸 후회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계속 볼 사이이면서 앞으로 내가 양해를 구해야 할 사람들에게는 장애를 먼저 밝히는 편이다. 눈이 좀 많이 안 좋아서 지나가다가 얼굴을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못 보고 지나쳐서이니 너그러이 봐주시라는 양해, 초점 부분이 잘 안 보여서 글씨를 읽거나 일을 할 때 조금 느릴 수도 있다는 양해. 말을 꺼낼 때는 나도 쑥쓰럽고 어색하지만 말을 하고 나면 후련하다. 더 이상 이 사람이 나에 대해 오해할 일은 없겠구나. 내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이해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와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하는 장애인들, 특히 타인에게 잘 '안 보이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장애에 대한 설명을 주저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이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의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면 먼저 장애를 밝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말하지 않고 꽁꽁 숨겨놓았다가 오해가 커지고 나서야 밝히면 오히려 이해받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반대로 용기내어 먼저 말을 꺼낸다면 생각지도 못한 호의와 상대방의 신뢰를 얻을 수도 있다. 자신의 아픔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힘든 일이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아직 나의 장애에 대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서툴다. 특히 처음 눈이 나빠졌을 때에는 친구들에게 그것을 알리는 것이 무척 부끄럽고 어려웠다. "나, 군대 가서 시각장애인이 됐어."라고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니 혼자 청승 떠는 것 같았다. 20대 초반의 나는 지금보다 덜 당당하고 덜 뻔뻔해서 결국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대충 내 장애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눈이 나빠지기 이전부터 알던 사이니까.


나는 아직도 나빠진 눈에 대해 형과 진지하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가족들조차도 내 눈의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3살 짜리 딸아이도 조금 더 크면 나의 장애에 대해 인식하고 질문할 것이다. 나는 나의 눈에 대해,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매번 두렵고 어렵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명하다 보면 설명이 늘겠지, 생각하며 오늘도 나는 내 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계속한다. "아, 제가 눈이 좀 많이 나빠서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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