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운동회 날, 아이들을 응원하기 위해 온 동네 부모님들이 운동장 여기저기 모였있다,
아이들의 재미있는 소리와 응원의 함성은 마치 축제의 장이다. 아이들의 머리에는 흰띠 파랑띠를 두르고 다들 푸른색 반바지에 빨간 윗옷의 운동복을 입고 있다. 일관된 옷을 입은 아이들 사이에서 자기아이를 찾느라 운동장이 분주하다.
여러 반 아이들은 키순으로 7-9명씩 줄을 지어 학년별로 앉아있다. 드디어 기다리던 달리기 시합이 시작 되었다. 체육선생님 손에는 깃발이 들려있고 호르라기를 불며 한 팀씩 뛰기 시작한다. 나의 차례는 세 번째다. 나의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마치 북처럼 쿵쿵쿵쿵 뛴다. 깃발 들리는 순간을 나는 너무나 무서워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 보다 뛰는 시작점이 늘 느렸다. 하지만 길고 빠른 다리를 갖은 나는 백미터 달리기에서 1등은 아니어도 2~3등은 했다.
그렇게 공책 한두 권을 상으로 받은 나는 엄마에게 자랑하려고 사람들을 제치고 엄마를 찾아 뛴다. 공책을 받아온 나를 보며 기뻐하던 엄마모습이 기억난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점점 엉덩이 살은 찌고 몸이 무거워져, 언제부턴가 운동이라고는 걷고 숨 쉬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렸다.
직장 생활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영업직으로 일하며 새벽 1~2시까지 술자리 접대가 일상이었다. 술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운동은 사치였다. 그런데 영업 활동에는 술뿐 아니라 골프 접대도 필수였다. 결국 자취방 근처 지하 골프장에 등록했다. 돈이 넉넉하지 않아 한 달만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처음 두 주 동안 7번 아이언으로 똑딱이 연습만 반복했다. 흥미를 느낄 새도 없이, 필드에 나가게 됐다. 하지만 나는 드라이버를 배운 적이 없어 18홀 모두를 7번 아이언으로 쳤다. 그렇게 7번 아이언만으로 몇 년 골프를 쳤다.
골프는 나에게 운동이 아니었다. 단지 접대 문화의 연장이었다. 골프장 앞 식당에서부터 소주 몇 병을 마시며 시작했고, 필드 중간 중간 그늘 집마다 술을 마셨다. 끝난 뒤에도 과음으로 이어졌다. “골프를 하면 술을 덜 마시게 된다”는 말에 시작했지만, 오히려 하루 종일 술로 이어지는 일이 태반이었다. 골프는 집중력을 요 하는 운동이다. 나는 성격이 급하며 집중력이 부족하다. 새벽 일어나기도 어려웠던 나에게 골프는 늘 “왜 하는지 모르겠다. 재미 없다”라고 생각한 운동이었다.
2020년, 코로나19와 함께 갱년기가 찾아왔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어들고, 적게 먹어도 살이 올랐다. 몸이 무거워져 걷기를 시작했는데, 걸어보니 이것도 만만치 않은 운동이었다. 처음에는 1km로 시작했지만, 점차 늘려 10km까지 걷게 되었다. 천천히 걸으면 2시간 안에 완주할 수 있었고, 걷는 시간이 좋아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곧장 나가곤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를 걷기로 시작했다.
그 당시 걷기는 술을 더 즐기기 위한 수단이었다. 갱년기로 몸 상태가 나빠져 술을 많이 못 마시게 되자, 술을 더 즐기기 위해 더 많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나는 땀이 나지 않았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내 체질이 의아하기도 하고, 땀을 줄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부럽기도 했다. 땀으로 몸속 독소를 빼고 나면 정말 상쾌할 것 같았다. 나도 흠뻑 땀 흘릴 수 있는 운동을 해보고 싶었다.
작년 초, 지인이 “뛰어 보는 건 어때요?”라며 마라톤에 도전해 보자고 했다. 걷기를 2년 동안 해왔지만, 달리기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뛴다는 건 무모한 일처럼 느껴졌지만, 지인의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땀도 나고 시간도 단축된다는 얘기에 다음 날, 용기를 내어 집 앞 공원에서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쉬어가며 달렸는데, 예상보다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주정도 지나자 10km를 거뜬히 뛸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나는 땀이 나지 않는 체질이 아니었다. 걷기보다 10배는 더 상쾌했다.
그 이후 마라톤 모임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좋은 운동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달리기를 하면서 내 삶은 조금씩 변화 했다. 가장 큰 변화는 술에 대한 태도다. 술을 마시면 다음 날 달리기가 힘들어지는 걸 몸소 느끼며 술을 줄이고, 점차 끊으려는 마음까지 생겼다. 걷기를 할 때는 술을 더 잘 먹으려고 걸었지만, 뛰기를 하면서는 뛰는 것이 좋아 술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보다 더 좋은 운동이 있을까?
요즘은 골프장에 가도 나는 잔디밭을 달린다. 캐디가 찾아야 할 공도 내가 산과 내리막을 뛰어다니며 찾는다. 골프 스코어는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골프장은 자연 속 운동장이다. 푸른 잔디밭 위를 내달리는 내 모습은 마치 광활한 초원을 누비는 타조 한 마리다.
달리기는 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리고 나는 이 변화를 온몸으로 사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