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성이 <역사의 쓸모>에서 “멘토로 삼을 역사 속 인물은 누구이며, 현실 속에서는 누가 있는가? 그를 통해서 도움을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 해주세요”라고 묻는다.
이 질문을 곱씹어보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역사 속 인물 중 내가 멘토로 삼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는 없었다. 살아오면서 그런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교과서나 책 속의 이야기일 뿐, 내 삶과는 동떨어져 보였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 남보다 잘해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IT업계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IT분야는 남성 중심의 문화가 강했으며, 여성 영업사원은 극히 드물었다. 주변의 시선과 편견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내 특기인, 술 영업의 최강자 ’술 상무‘ 이름답게 그 당시 영업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서 일했다. 비록 남성 동료가 많았지만, 동료들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구축하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영업 전략과 시장 동향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내 영업 방식을 개척하고, 고객의 니즈를 잘 파악하는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했고 중요한 거래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긍정적 마인드로 늘 노력하는 자세로 임했기에 사람들에게 신뢰를 쌓았다. 이런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언제부턴가 IT업계 ’여전사‘로 불리면서 여자 영업사원들이 나를 롤모델이라하며 찾아오곤 했다.
“상무님, 너무 존경스러워요. 이런 어려운 남자들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는 비결이 뭔가요? 사람들이 상무님을 다 좋아하시던데. 많은 경험 직접 말씀 듣고 배우고 싶어요” 동종업계이며 경쟁 업체인 여자 차장이 몇 번의 전화 연락을 하더니 점심을 먹자고 찾아왔다. 서너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김차장은 마치 스펀치처럼 내 이야기를 흡수하려 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내가 경험한 실패와 성공,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법을 이야기 했다. “그런데 제조사에 노 부장 있잖아요, 그분 성질 장난 아니잖아요, 상무님을 참 좋아하시던데 어떻게 그런 분이랑 친해지셨어요?” 듣고만 있던 김차장이 마지막에 일 이야기를 꺼냈다. “내 생각으로는 노 부장님이 질풍노도 시절에 부모님의 사랑이 부족하게 자랐던 것 같아. 나도 우리 아들 사랑을 못 줘 나중에 노 부장 같은 사람이 되면 어쩌지? 하는 맘으로 동정심으로 아들이라 생각하고 그냥 들어주는 거뿐이야. 우리 회사 영업들도 노부장 때문에 많이 괴로워해 그런데 그분은 상대방의 그런 상황을 몰라, 참 답답한 분이시지“ 나는 노부장을 동정심과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이야기 해주었다.
한 달 후 노부장과 저녁 식사가 있었다. “최상무, 김차장을 며칠 전 만났는데 당황스러운 얘길 하더라. 이 얘길 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다가 하네. 그 친구 순수해 보이지만 여우고 말이 많더라고, 최상무가 사람을 잘 믿잖아. 김차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라고 경고를 했다.
노부장은 말을 잠시 멈춘 후 소주 한잔 벌컥 들이키더니 다음 말을 이었다. ”아니, 우리 둘이 무슨 이상한 사이냐는 거야. 어떻게 최상무가 아들로 볼 정도로 그렇게 친하냐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어이가 없어 욕이 나와 버렸다. ”진심을 다해 이런저런 이야기 해줬더만, 그런 저질스러운 년이 있나, 내가 자기 롤모델이라하고 와서 이것저것 묻고 조언 듣겠다고 단물 쪽 빨아가더니 나를 그렇게 취급했다구요? 상대할 여자가 아니네요. 참 내 맘 같지 않네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나는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일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내 행동을 돌아보며 반성했지만, 마음속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또 다른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기보다, 진정으로 가까운 이들의 멘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족과의 소통이 단절되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본다. 일에 치여 가족과의 대화는 줄어들고, 아이와의 소통은 단순한 일상적인 대화로만 이어졌다. 남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꿈과 목표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고, 그저 하루의 피로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그들을 방치한 채 살아왔다.
이제 나는 남편과 아이의 멘토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들에게 내가 배운 것들을 나누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 남편과의 대화에서 서로의 꿈과 목표를 이야기하고,
아이에게는 세상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아이가 원하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나다움을 찾으면서 나의 변화된 삶이 그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우리 가족이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