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발리에서 생긴일

by 허당 써니

“써니씨, 무서워하지 말고 뛰어내려요! 하나, 둘, 셋!”

그 순간, 나는 차마 발을 내딛지 못했다. “미안해요, 저 못할 것 같아요.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게 물인데, 그 물속으로 다이빙하다니... 오십이 넘어서 이건 무모한 짓이에요.”

이미 다이빙을 마친 현지 가이드와 박 대표는 아무 말 없이 물속을 헤엄치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강요하지 않지만, 묵묵히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설득해 보았다. '여기서 뛰어내리는 게 내 인생의 특별한 도전이 될까? 아니야, 이건 무모한 짓일 뿐이야.' 결론을 내렸지만, 어느새 몸은 앞으로 쏠려 있었다. 수없이 팔을 허우적대다가 결국, 나는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떨어져 버렸다.

다이빙할 때는 차렷 자세로 수직 낙하해야 하는데, 나는 마치 박쥐처럼 사지를 활짝 편 채로 수평으로 추락했다. 물에 부딪히는 순간, 마치 바위에 부딪힌 듯 온몸이 저렸다. 숨이 턱 막혔다.

“와우! 써니씨, 브라보! 이렇게 박쥐처럼 뛰어내린 사람은 처음 봤지만 멋져요!”

두 사람은 당황해 하면서도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다이빙이 끝났다. 하지만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은 폭포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다이빙보다 세 배는 더 높은 곳에서 미끄러져 내려가야 했다.

'그래, 이번에는 내가 제일 먼저 해보자. 그리고 나비처럼 멋지게 내려가 보자.'

주저하지 않았다. 선두에 서서 물살을 타고 그대로 우아하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물과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가 이런 것들을 해내다니. 비록 다이빙은 내 의지가 아닌 실수로 이루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서 가장 짜릿한 경험 중 하나가 되었다.


한 달 전, 작년에 트레킹으로 다녀온 알프스 몽블랑 투어를 함께했던 지인과 우연히 짧은 트레킹을 계획하다가 발리를 가게 되었다. 대학 CEO 모임에서 만난 박 대표의 첫인상은 솔직히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프랑스 유학파답게 차분하고 점잖았으며, 그녀의 세계는 나와 너무 달라 보였다. 대기업 총수들과 어울리고, 한두 달에 한 번씩 럭셔리한 유럽 여행을 떠나 미술관을 방문하거나 그림을 사 모으는게 취미인 사람이다. 하지만 산악회에서 우연히 함께 등산을 하게 되면서 예상과 다른 그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연약해 보였지만, 산을 꽤나 능숙하게 오르던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이 생겼다.

술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계획한 4명의 몽블랑 투어는 처음부터 미묘한 갈등이 시작되면서 두 명씩 팀을 이루어 2주간을 나는 박대표랑 함께 지냈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진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 때의 인연이 우리를 다시 발리로 가게 했고, 예상치 못한 도전을 하게 된 것이다.

트레킹이라면 보통 간소한 숙소에서 머물겠거니 했지만, 여행을 많이 다녀본 박 대표는 최고급 리조트를 예약해 두었다. '인생 뭐 있어? 일단 가보자.' 계획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따라나선 여행이었는데, 그 규모와 화려함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전 세계 럭셔리 호텔과 리조트의 VIP 회원이었고, 덕분에 생각했던것보다도 합리적인 가격에 숙박할 수 있었다.


영업인으로서 30년을 살아온 나는 사람을 잘 공감해주고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힘든 여행에서는 가족끼리도 싸우기 마련인데, 박 대표와는 이상하리만큼 코드가 잘 맞았다. 인생에 내가 원하는 방식의 여행을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우리는 여러 도전을 함께했고, 리조트에서는 최고의 미슐랭 셰프가 선보이는 요리와 최고급 와인 서비스를 받으며 내 생애에 최고급 럭셔리 여행을 만끽했다.


“써니씨는, 정말 열정적이고 삶을 즐기는 모습이 멋져요. 저는 그렇게 살지 못하거든요.”

박 대표는 침대에 누워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저는 지금 죽어도 후회 없어요. 어릴 때 너무 몸이 약해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거든요. 지금은 사람 구실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써니씨처럼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이 부러워요.”

“대표님은 가진 것도 많고, 원하면 뭐든 할 수 있잖아요. 이만하면 충분히 열정적인 삶을 사는 거 아닌가요? 저는 오히려 대표님이 부러운데요.”

술기운이 살짝 올라와 더워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물결 속에서 나의 몸은 가볍게 떠올랐다. 물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마치 엄마 뱃속에서 둥둥 떠 있는 듯한 편안함이 몰려왔다. 우리는 룸서비스로 와인 한 병을 더 시켜 물속에서 반쯤 마시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가 된 듯 나는 자유롭게 과거의 경험들을 털어놓았다. 규칙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조르바처럼, 나 역시 거리낌 없이 내 이야기를 풀어냈다. 박 대표는 그런 내 모습에 흥미를 느꼈고, 어느새 그녀의 눈빛은 조르바 에 매료된 소설 속 화자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세상 아무 걱정 없는 사람이 되어 순간을 즐겼고, 그날 발리의 밤에서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축제가 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