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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는 인연, 머무는 관계

by 허당 써니

"지점장님, 한 시간 일찍 시청역에서 뵈시죠?"

오늘은 전주에서 먼 길을 오시는 지인과의 모임이 있는 날. 본 모임에 앞서 따뜻한 담소를 나누기로 했지만, 기차가 연착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써니 씨, 기차가 늦어질 것 같아요. 30분 뒤에 봐요." 원래 시간에 도착하는 듯했으나, 오늘따라 연착이 반복된다는 소식이었다.

사무실 전자시계의 붉은 숫자가 정확히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고 모자를 단단히 눌러쓴 채,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뚝섬역을 향해 걸었다. 여유로운 발걸음이었지만,


우연이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

뚝섬역 3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려던 찰나, 오래전 함께 근무했던 동료가 내 시야를 스쳤다. 우리는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마지막으로 만난 건 2년 전이었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했던 그가 지금 내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한 듯 신호등을 건너갔고, 나 역시 선뜻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추운 날씨 속에서 그를 불러 세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 순간, 이어폰 너머로 전화벨이 울렸다.

"써니 씨,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뚝섬에 미팅이 있어 왔다가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불과 1분 전,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어야 했다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방금 그를 보았다는 말 대신, 담담히 응대했다.

"저 지금 막 뚝섬역에서 지하철 타려던 참이에요. 먼 길 오셨는데, 다음에 꼭 한번 뵈어요."

그렇게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짧은 통화를 끝냈다.


목적지인 시청역에 도착하자, 전주에서 올라온 지점장도 막 지하철에서 내리고 있었다. 비록 일주일에 서너 번씩 통화하는 사이였지만, 만나자마자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5년 전 CEO 모임에서 처음 만났을 뿐인데, 이제는 친자매보다 더 깊은 정을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영업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대부분은 이해관계 속에서 연결된 인연이라 업무가 끝나면 자연스레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사람만큼은 달랐다. 일과 상관없이, 마음이 통해 이어지는 관계였다.


최근 내 삶의 루틴은 많이 변했다.

새벽 3시 30분 기상을 위해 일찍 잠들어야 하고, 자연스레 저녁 모임도 줄어들었다. 고객 접대도 점심으로 대체하려 애쓴다. 한때 사람들과 함께하는 걸 즐기던 내가, 이렇게 사람을 피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내 삶은 평온하고 행복하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다시 뚝섬역에서 지하철을 내렸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려던 순간, 오후 5시 30분에 스쳤던 옛 동료가 또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술기운이 오른 얼굴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갔다.

이번에도 그를 부를까?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결국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두 번이나 마주친 이 기묘한 우연에 묘한 웃음이 났다.

'지금 내 100미터 반경 안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던가. 수많은 스침 속에서,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집을 향해 걸으며, 나는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 너머,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읽어본다.


우리는 수많은 인연을 만나지만,

그중 일부는 우리 곁에 머물며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어떤 사람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스쳐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마음을 나누는 존재로 남는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어떤 관계를 지켜야 할지, 누구와 더 깊은 인연을 만들어야 할지를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마주칠 순간에, 그 관계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를 조용히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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