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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지 말고 계속 뛰세요.

by 허당 써니

“써니 씨, 요즘 변화된 삶을 산다면서요? 걷기도 하고, 산도 탄다던데… 다음 달에 마라톤 대회가 있는데 저랑 같이 하프 한번 뛰어볼래요?” 지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지만,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 탓에 얼떨결에 하프 마라톤에 동의하고 말았다.

"하프면 거리가 얼마나 되요? 대충 몇 시간 정도 달려야 하나.. 난 하프 거리도 모르는데"

주저하면서도 뛰고 싶은 설렘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단순히 건강을 위해 시작한 걷기는 이제 일상이 되었고, 가벼운 산행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마라톤에 진심인 지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권유로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게 되었다.


10월, 대회 날 아침

하늘은 맑았지만 바람은 차가웠다. 지인과 나는 상암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평소 집에서 입던 추리닝 바지에 두꺼운 옷을 겹겹이 입고 잠바까지 걸쳤다. 역에 도착하자,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모두 반팔과 반바지 차림이었다. 그 위에는 얇은 비닐 옷을 걸친 채 몸을 풀고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을 위해 모였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들의 열정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인을 만나자마자 그녀는 말했다. “써니 씨, 절대 힘들어도 걷지 말고 천천히라도 뛰면서 피니시해야 해요.”

너무 많은 인파 속에서 정신이 없던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하프코스 출발선에 섰다. 주위의 사람들을 보며 괜히 주눅이 들었지만, ‘일단 뛰어 보자’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설렘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출발 신호가 울리자, 지인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처음 20분은 나란히 달렸지만, 점점 그녀의 속도가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 멀어졌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렸다. 중간중간 거리 표지판이 보였다. 10km 지점. 그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절대 걷지 말고 뛰어야 해.’


5km 남았다

이제 걷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뛰다가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내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걷지 말고 뛰라’ 는 말이 나를 붙들었다.


3km 남았다

결승선이 보였다. 하지만 보인다고 해서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500미터 남았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아있는 힘을 쥐어짜 단거리 선수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21.0975km를, 생애 처음으로 2시간 10분 만에 완주했다.

지인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저 멀리 환하게 웃으며 양손 엄지를 치켜든 그녀를 발견했다. 하지만 나는 뿌듯하기보다 그저 ‘나는 뛰었다. 걷지 않고 뛰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후, 나는 달리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3개월 후, 아들과 함께간 유럽여행지에서도 나는 달리고 있었다. 새벽 5시, 파리에서 에펠탑을 바라보며 센강을 따라 달렸고, 뮌헨의 겨울 찬바람을 스치며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을 밟으며 '영국 정원'을 뛰었다.

세느강변에 비친 조명은 한폭의 수채화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그 멋진 풍경을 보며 어둠속에서 홀로 달렸던 그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해 3월, 국제 마라톤 대회인 동아마라톤 풀코스(42.195km)에 도전하여 4시간 40분 완주했다.

그때도 나는 오직 한 가지를 떠올리며 달렸다. ‘절대 걷지 말고 계속 뛰자.’


서울 종합운동장 피니시 라인에 들어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날도 걷지 않고 계속 뛰어 피니시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단 하나, 완주 후 마시는 막걸리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구나…! 완주 후 마시는 막걸리의 맛은 그 어떤 것보다도 달콤했다.

그 후, 나는 마라토너가 되었다. 매일 아침 서울숲에서 10km를 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단 한 걸음의 용기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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