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따스한 봄볕 아래 땅속 생명의 씨앗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을 이 시기에, 느닷없이 하얀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자연의 섭리는 이제 예측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만들어낸 환경 파괴가 기온 변화를 불러왔고, 계절은 본래의 질서를 잃어 혼란을 빚고 있다. 하지만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눈송이들이 내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써니야, 다시 만나 반갑다. 너는 여전히 달리고 있구나. 네 얼굴에 내가 살포시 앉아 차갑게 하는 건 미안해."
나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너를 다시 만나 반가워. 하지만 이제는 미련을 버리고 네 세계로 떠나도 좋을 것 같아. 봄의 생명들이 찾아와야 하니까."
내 말을 들었는지, 눈발이 점차 잦아든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나무 위에 남아 있던 함박눈이 와르르 쏟아지며 내 온몸을 감싼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하듯 사라져갔다. 이별을 고하는 눈송이들이 남기고 간 차가운 감촉이 가슴 한구석을 아리게 만든다.
아침 일찍,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펼쳐 들었다. 책장을 넘기며 등장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른다.
"동호냐. 아버지의 목소리가 안방에서 우렁우렁 울려왔다. 우리 동호 들어왔냐? 동호야, 왔으면 이리 들어와서 아버지 허리 좀 밟아봐라."
문장을 읽는 순간,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일을 마치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피곤한 몸을 추스르며 우리 세 자매를 불러 다리와 어깨를 발로 나누어 주물러 달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저 장난처럼 느껴졌던 그 시간이, 이제 와서는 아버지의 지친 삶이 전해져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책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니,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집에 가자. 군대가 들어올거야. 집에 가자."
"여기 6시에 문 닫는데요." "그럼 그때 들어갈게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엄마가 말한다. 해 지기 전에 와랑. 다 같이 저녁밥 묵게."
단순한 대화 속에 배어 있는 불안과 절망.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의 애틋함. 그 시절, 광주의 거리에서 얼마나 많은 소년들이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을까? 그들은 무엇을 꿈꾸었으며, 어떤 미래를 바라보았을까?
"우리들의 몸은 열심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더 이상 읽을 수가 없다. 마음이 무너진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 끝내 벌을 받지 않고 떠난 자들. 그들은 과연 저승에서라도 벌을 받을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처럼 또다시 유유히 떠돌고 있을까?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밖으로 나와 달린다. 얼굴에 닿은 눈물과 녹아 내리는 눈송이가 섞이며, 내가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출근길, 젊은 직원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밤새 SNS를 보느라 피곤에 찌든 눈, 초점 없는 생기 없는 표정. 출근해서 마주한 이들의 모습은 마치 무기력함에 사로잡힌 듯하다. 그들에게 상사의 한마디는 잔소리로 들릴 테지만, 나는 그들에게 작은 위로를 주고 싶었다.
회사에 출근한 나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우리 모닝커피 마시러 갈까?"
성수동의 한 핫한 카페로 향했다. 직원들은 언제나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반면 나는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주문한다.
"차는 커피보다 두 배나 비싸네요?" 한 직원이 웃으며 말한다.
"나도 너희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겼어.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커피가 잠을 방해하고, 차가운 음료가 몸을 차갑게 만들더라고."
조금씩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차가운 바람에 뛰어 차갑워진 몸이 편안함을 느낀다. 직원들도 사무실이 아닌 커피숍에서 하루 일을 시작함에 작은 활력을 얻는 듯 편해 보인다. 출근길에 보였던 피곤한 눈빛이 차츰 부드럽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변화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부모나 회사 리더들의 어떤 작은 행동이나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하루를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더욱 따뜻한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긴다. 『소년이 온다』 속 청년들은 한 개인의 욕망 때문에 삶을 잃었다. 그들의 죽음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우리는 한 개인의 욕망이 만든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잘못된 것을 정당화하려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직원들과 모닝커피로 아침 미팅을 마친 후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서울숲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창밖으로 눈 꽃 나무들이 보인다. 한 손엔 따뜻한 차를 들고, 다른 한 손엔 책을 들고 있다.
눈 내리는 3월, 봄을 기다리며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또 한번 가슴이 뭉굴어진다.
"사위어가는 잔불의 주황빛 불꽃 사이로 나는 스며들어가 보았어. 세찬 불길 속에서 몸들의 탐은 무녀져, 뒤섞인 뜨거운 유골들을 더는 구별할 수 없었어. 고요한 새벽이었어.
그때 너는 죽었어. 여전히 눈에서 피가 흐르는 채, 서서히 조여오는 거대한 얼음 같은 새벽빛속에서 나는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었어."